아일랜드와 영국의 아픔을 품은 경계인 맥주
기네스 스타우트는 아일랜드의 와인이다
율리시즈를 쓴 아일랜드 대표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기네스를 와인에 비유했다. 고혹적인 흑색 바디와 매끈한 흰색 거품, 부드러운 탄산을 뽐내는 기네스, 신맛도 과일향도 없는 이 맥주를 그는 왜 와인에 빗댄 것일까?
매일 천만 잔 이상 팔리며 2조 3천억 이상의 브랜드 가치를 가지는 흑맥주.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맥주이며 역사 상 가장 성공한 브랜드인 기네스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비극적 관계에서 바둥거려야 했던 실존적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영연방 제도에 낯선 우리는 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라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 둘은 인종과 종교 심지어 모국어까지 다르다. 아일랜드는 앵글로 색슨족인 영국과 달리 켈트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게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5세기 성 패트릭(St. Patrick)에 의해 영국보다 먼저 가톨릭이 전파되었으며 ‘켈스의 서’와 같은 위대한 유산을 보유한 문화 강국이다.
맥주는 아일랜드의 오래된 음료였다. ‘고대 아일랜드의 예절과 풍습’의 저자인 유진 오커리는 고대 켈트족은 이미 맥주를 질펀하게 마시는 민족이었다고 언급했으며 2001년 고고학자 디클레 모어와 빌리 퀸은 켈트어로 맥주를 뜻하는 ‘베와르’(beoir)가 청동기 시대부터 있었다고 밝혀냈다. 가톨릭이 뿌리내린 이후, 아일랜드 맥주는 수많은 수도원과 함께 발전했다. 포도가 없던 아일랜드에서 와인을 대신했고, 배고픈 순례자들을 위해 제공되었다. 평민부터 수도사, 영주까지 아일랜드(Ireland)는 맥주 없이 살 수 없는 섬(Island)이었다.
12세기 헨리 2세의 침공으로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아이리시 문화는 존중되었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악연은 1534년 헨리 8세부터 시작된다. 성공회의 수장이었던 그는 아일랜드 왕이 되어 가톨릭을 차별하고 탄압했다. 17세기 찰스 1세를 처형한 올리버 크롬웰은 독립을 원하는 아일랜드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도 했다. 18세기에는 영국인과 스코틀랜드인이 북아일랜드로 이주했는데 영국은 이들에게 막대한 토지를 분배해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을 소작농으로 만들었다. 이들이 경작한 보리, 호밀, 귀리 같은 곡물은 영국으로 수출되어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량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설상가상 19세기 감자 대기근은 아일랜드가 맞닥뜨린 가장 큰 재앙이었다. 소작농이었던 아일랜드인에게 텃밭에서 재배한 감자는 유일한 식량이었다. 1845년 미국에서 시작된 감자 역병이 아일랜드에 돌자 많은 사람들이 아사 위기에 처했다. 충분히 도울 힘과 능력이 있었음에도 영국은 이를 방치했고 그 결과, 100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이 굶어 죽었고 100만 명은 나라를 떠나 전 세계로 흩어졌다. 전 인구의 25%가 감소한 비극이었다. 1851년 감자 역병은 사라졌지만 이 당시 기억은 아일랜드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있으며 영국에 대한 분노와 저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불타올랐다.
맥주 역사만큼 우연과 아이러니가 있는 곳이 있을까? 아일랜드 맥주 산업은 악연인 영국에 의해 발전하기 시작한다. 18세기까지 대부분의 아일랜드 지역에는 이렇다 할 양조장도 없었고 생산된 맥주를 소비할 시장도 부족했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는데, 북아일랜드와 더 페일(the pale)라고 불렸던 더블린 지역이었다. 영국과 가까운 이곳은 오래전부터 은행, 부동산, 상업 등이 런던과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먹을 곡물도 부족했던 아일랜드 서쪽, 남쪽과 달리 더블린은 영국의 경제 공동체로 아일랜드 산업의 중심이었다. 시장이 존재했고 맥주 수요도 풍부했던 이곳에서 아일랜드 맥주 산업의 싹이 움텄다.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 1759년 앵글로-아이리시 가문 출신의 이 남자는 더블린에 9년째 방치된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St. James’s Gate) 양조장을 인수한다. 그는 1755년 고향 킬데어의 릭슬립(Leixlip)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다 성공을 위해 가장 큰 시장인 더블린으로 이주했다. 9000년 동안 월 임대료 45파운드라는 놀라운 조건으로 인수한 새로운 양조장 이름은 기네스(Guinness)였다.
별 볼일 없던 그의 맥주가 360도 바뀐 건 포터(porter)를 만들기 시작한 후부터였다. 포터는 짙은 어두운 색을 띠는 영국 에일로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맥주였다. 1778년 포터를 판매하기 시작한 기네스는 곧 성공의 기운을 감지했고 1799년 한 우물만 파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의 이런 통찰력은 정확히 맞아 들었다.
기네스 포터는 영국에서 수입된 포터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1810년에는 영국으로 수출되었는데, 런던의 기라성 같은 포터를 이기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더블린의 물이 검정 맥주를 만들기에 더 적합했다. 더블린은 칼슘과 마그네슘 함량이 굉장히 많은 경수다. 경수는 밝은 색 맥주보다 어두운 색 맥주를 만드는데 유리하다. 런던의 물 또한 경수지만 더블린의 물이 검정색 맥주에 더 적합했다.
블랙 페이턴트 몰트의 적극적인 사용도 기네스 흑맥주의 맛과 품질을 높였다. 블랙 페이턴트 몰트란 색이 완전히 검정색인 몰트를 의미한다. 몰트, 즉 맥아는 보리를 굽는 정도에 따라 색이 다른데, 18세기만 해도 몰트를 완전히 검게 하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포터 양조사는 어두운 색을 위해 다량의 브라운 몰트 대신 태운 설탕 같은 부가물을 넣곤 했는데, 이로 인해 맥주의 품질이 나빠지기도 했다.
1817년 다니엘 휠러가 로스팅 드럼을 이용해 검정색 몰트 제조에 성공한 후, 양조 기술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블랙 페이턴트 몰트(black patent malt), 또는 블랙 몰트로 불리는 이 몰트를 사용하면 브라운 몰트와 태운 설탕을 사용하지 않고 더 쉽고 정확하게 검정색 맥주를 만들 수 있었다. 보수적인 런던 양조장들이 기존의 레시피를 고수했던 반면, 기네스는 다른 곳보다 먼저 블랙 몰트를 자신들의 포터에 적용했고 완연한 흑색을 띠며 더 깔끔한 향미를 가진 맥주를 출시할 수 있었다.
아서 기네스 사후, 양조장을 물려받은 아서 기네스 2세는 기네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폭발적인 성장의 토대를 구축했다. 기네스는 작은 아일랜드 시장을 벗어나기 위해 일찍부터 수출 전략을 택했고 곧 놀라운 성과로 돌아왔다. 1801년 선보인 웨스트 인디아 포터(West India Porter)는 이런 기네스의 역작이다. 당시 수출에서 오는 변질을 막기 위해 알코올을 높이고 다량의 홉을 넣은 이 맥주는 카리브해 국가와 아프리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Foreign Extra Stout)로 이름이 바뀐 이 맥주는 여전히 해외에서는 사랑받으며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1821년 아서 기네스 2세가 출시한 엑스트라 스타우트 포터(Extra Stout Porter)는 지금의 기네스 오리지널 스타우트의 모태가 되는 맥주다. 스타우트는 원래 스트롱(Strong)을 의미했다. 1630년대부터 ‘높은 알코올을 갖는’, ‘프리미엄’이란 뜻으로 사용되며 주로 포터를 설명하는 단어로 쓰였다. 일례로 스타우트 포터는 일반 포터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고급 포터를 뜻했으며, 스트롱 포터(strong porter)는 브라운 스타우트(brown stout)와 혼용되어 불리기도 했다.
19세기 중반부터 기네스의 기세는 멈출지 몰랐다. 영국은 물론, 유럽 대륙과 미국, 호주, 아프리카와 아시아까지 수출되며 1910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 양조장이 되었다. 1954년 출시한 기네스 드라우트(Guinness Draught)는 이런 성공에 방점을 찍은 맥주다. 질소로 인한 폭포수 같은 거품과 실키한 질감 그리고 가벼운 목 넘김까지, 지금 우리가 기네스 하면 떠올리는 맥주다. 점차 기네스 드라우트는 아이리시 스타우트라는 스타일로 정착되었고 아일랜드 맥주의 아이콘이 되었다.
20세기 들어 라거가 맥주 시장을 점령하며 영국 맥주들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기네스는 살아남았다. 그 시점에 아일랜드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1916년 독립 전쟁을 시작한 아일랜드는 세계 1차 대전이 지난 1921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어 800여 년 만에 영국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9년 영연방으로부터 탈퇴한 후 아일랜드 공화국이 된다.
기네스도 시나브로 영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포터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자신의 맥주 이름으로 스타우트를 사용했다. 스타우트가 더 이상 ‘스트롱’이 아닌 ‘아이리시 흑맥주’로 완벽하게 치환된 것이다. 아일랜드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기네스의 포터로부터의 독립, 우연일지라도 옹골진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통쾌한 일이 아닐까?
그럼에도 기네스에 대한 비판은 존재한다. 아일랜드보다 영국과의 관계에서 성장했고 감자 대기근 같은 어려운 시기에 아일랜드인들을 적극적으로 구호하지도 않았다. 또한 아일랜드 독립에 대해서도 불분명한 태도를 견지한 것도 사실이다. 반면, 개신교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네스는 아일랜드 가톨릭을 지원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구호활동을 꾸준히 실행했다. 1862년에는 아일랜드 국장인 하프를 라벨에 넣어 아이리시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도 했다.
이런 기네스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기회주의자일까, 아니면 경계인일까?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테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아일랜드인들은 기네스를 아이리시 정체성이 담긴 자신들의 맥주로 인정하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아일랜드가 켈틱 호랑이로 불리며 경제적 성장을 통해 선진국 반열에 들고 난 후,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의 열등감은 사라지고 상처는 치유되었다. 영국 또한 과거사를 반성하며 지금은 두 국가는 가장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 어쩌면 고혹적인 기네스의 흑색은 어쩌면 이런 아일랜드와 영국의 모질고 아픈 역사를 조용히 품기에 가장 좋은 색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아일랜드의 와인’이라는 표현보다 ‘아일랜드의 검은 와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