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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Sep 29. 2022

효모로 세상을 바꾼 맥주, 칼스버그

왕관은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맥주를 만든다면, 경쟁자를 두려워할 필요 없다


1883년 11월 덴마크 코펜하겐, 칼스버그 대표 야콥 크리스티안 야콥센(Jacob Christian Jacobsen)은 맥주 역사 상 가장 혁신적인 연구 결과를 보고를 받은 후, 과감히 공개를 지시했다. 회사 기밀로 유지하면 엄청난 부가 보장될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반대의 목소리가 나올 법도 했지만, 누구도 그의 지시에 토 달지 않았다. 칼스버그 연구소에서 나온 결과물은 전 인류와 공유한다는 철학을 따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칼스버그 창립자, 야콥 크리스티안 야콥센

20세기 이전 맥주는 맛과 품질이 일정하지 않았다. 효모들이 다른 미생물에 쉽게 감염이 되기 일쑤였고 같은 효모라 할지라도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만약 최상의 맛과 품질을 만드는 효모를 골라내 지속적으로 배양할 수 있다면 인류는 차원이 다른 맥주를 경험할 수 있을 터였다. 양조장 또한 수익과 운영에서 높은 안정성을 기대할 수 있었다.


1883년, 칼스버그 연구소가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연구소장이던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은 각고의 연구 끝에 효모를 단일 균체로 분리하고 배양하는 데 성공한다. 이 기술을 보유했다는 것은 칼스버그가 세계 최고의 라거 맥주를 독점적으로 양조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콥 야콥센은 모든 지식과 정보를 공개하고 원하는 양조장에 자신들이 발견한 효모를 보냈다. 정말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고결한 철학 때문이었을까? 사업가로서 라거 맥주 시장의 파이를 폭발적으로 키울 수 있으리라는 야망 때문 아니었을까?



칼스버그 브루어리, 위대한 여정의 시작

코펜하겐 칼스버그

19세기 중반, 라거 맥주의 발전을 위해 세 명의 선구자가 움직인다. 독일 슈파텐 양조장의 가브리엘 제들마이어 2세, 오스트리아 출신 안톤 드레허 그리고 덴마크 출신 야콥 야콥센이었다. 야콥센이 맥주 기술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뮌헨 슈파텐 양조장을 방문했을 때, 이 세 명은 당시 세계 맥주 시장을 주름잡던 영국 에일에 대항하기 위해 라거에 배팅하기로 결심하고 연구에 매진한다. 때마침 1842년 체코 플젠에서 세상에 나온 필스너 우르켈은 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선사했다.


1845년 뮌헨에서 자신의 고향인 덴마크로 돌아온 야콥센의 손에는 슈파텐에서 가져온 효모가 들려있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효모가 죽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중간중간 물을 뿌리며 마차를 탄 젊은 야콥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신만의 맥주를 만든다는 기대감, 실패할 수 있다는 두려움, 새롭게 출현할 라거에 대한 설렘, 그가 느꼈을 감정이 어땠는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1847년 야콥슨은 아들 칼(Carl)의 이름과 덴마크어로 언덕을 뜻하는 베르그(bjerg)을 붙여 ‘칼스버그’(Carlsberg) 양조장을 코펜하겐에 설립한다. 흥미로운 건, 그가 과학에 관한 지식이나 학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맥주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필경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였던 아버지 한스 크리스티안 오스테드와 뮌헨에서 함께 라거 연구를 했던 동료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또한 영국의 양조 산업을 탐방하며 장치 산업에 대한 이해도를 넓혔던 경험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칼스버그, 맥주 양조에 과학을 더하다

칼스버그 연구소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

양조장 설립 초기 칼스버그의 맥주는 어두운 색 라거였다. 효모는 뮌헨 슈파텐의 것이었지만 스타일은 안톤 드레허의 어두운 색 비엔나 라거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라거는 15세기부터 존재했지만 안정적인 생산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칼스버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라거 효모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낮은 발효 온도를 유지시킬 수 있는 냉장시설과 장치도 없었다.  


1860년대에 들어서야 라거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파스퇴르의 효모와 젖산균 발효에 대한 연구는 미생물학자와 의사뿐만 아니라 양조자들에게도 큰 희망을 준다. 야콥슨은 과학이 맥주 양조 중 겪는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확신하며 1875년 세계 최초의 맥주 연구기관인 ‘칼스버그 연구소’를 세운다. 맥주 재료, 양조, 발효 등 맥주에 대한 연구들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고 곧 위대한 연구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거 효모의 순수 분리 배양은 그 믿음에 대한 첫 결과물이었다. 그전까지 맥주 양조는 기술이 아닌 운과 환경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곤 했다.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은 이런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는 양조장의 효모가 여러 균체와 다양한 개체군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 소수의 효모 균주만이 발효에 가장 적합하다고 가정했고 이를 찾는 실험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실험과 발효를 진행한 결과 단일 세포에서 자란 순수한 라거 효모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고 칼스버그는 이 효모를 가지고 기존과 다른 수준의 라거를 만들었다.  


학계에서는 이 효모에 칼스버그의 이름을 따 ‘사카로미세스 칼스버겐시스’(Saccharomyces carlsbergensis)라는 학명을 붙였고 사람들은 단순히 ‘라거 효모’(Lager yeast)라고 불렀다. 칼스버그가 위대한 것은 이 라거 효모를 필요한 모든 양조장에 보냈기 때문이다. 라거 시장의 파이를 키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폄하할지라도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많은 양조장이 이에 대해 고마움과 경의를 표했다. 일례로 1885년 네덜란드 하이네켄 또한 칼스버그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계기로 라거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맥주 시장의 판도를 순식간에 바꿔 놓는다. 20세기 들어 영국 에일은 선반 한 끝으로 밀려났고 라거가 새로운 왕좌에 앉게 된다.


1909년 칼스버그는 또 다른 업적을 세상과 공유한다. 2대 연구소장 소렌 소렌슨이 수소 이온 농도 지수인 pH(power of hydrogen)를 발표한 것이다. pH는 산성과 알칼리성의 정도를 0~14까지의 지수로 표시한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pH는 맥주 양조에서 가장 중요한 효소와 효모의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서 이에 대한 관리와 조절은 맥주 향미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품질의 핵심이다. 소렌 소렌슨의 이 연구는 맥주뿐만 아니라 화학계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그 공로로 소렌슨은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덴마크 맥주의 자존심, 칼스버그 필스너


최초의 칼스버그 로고

1904년 칼스버그 최초의 밝은 색 라거, 필스너가 출시된다. 아들인 칼 야콥센이 만든 이 맥주가 현재 칼스버그의 시그니쳐다. 필스너 우르켈이 나온 지 64년 만이니 명성에 비해 늦은 감이 있지만, 그 시절 안정적인 황금빛 라거 생산이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칼스버그 필스너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시장을 휩쓸었고 덴마크 황실에 공급하는 첫 맥주로 선정되기도 했다. 칼스버그 로고 위에 보이는 왕관도 바로 이때 붙여졌다.


칼스버그 필스너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부드러움’이다. 투명한 밝은 황금색 칼스버그를 머금으면 섬세한 탄산과 쓴맛이 입안을 간지럽힌다. 깔끔하고 청량하며 무난하다. 진하고 무거운 필스너 우르켈이나 깨끗하지만 다소 날카로운 하이네켄과는 다른 결을 갖고 있다. 가볍지만 우아하며 모나지 않고 기품이 있다. 5%의 알코올은 이 모든 것을 받치는 기둥과 같다.

칼스버그 @윤한샘

하지만 내가 칼스버그를 마실 때마다 느끼는 건, 단순한 향미가 아니라 아우라다. 오리지널 라거 효모를 사용한 맥주라는 아우라, 덴마크 황실이 인정한 맥주라는 아우라 그리고 더 나은 맥주를 만들기 위해 얻은 지식을 세계와 공유한 양조장이라는 아우라는 다른 맥주에서 맛볼 수 없는 칼스버그 만의 독특한 아로마와 같다.


2016년 칼스버그는 1883년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이 발견한 라거 효모로 만든 맥주를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창고에서 발견된 맥주에서 당시 효모를 추출해 그때 레시피로 맥주를 만든 것이다. ‘1883’이라고 명명된 이 맥주는 인류 발전에 기여한 위대함과 헌신을 상징한다. 맥주가 단순히 알코올을 함유한 술이 아닌,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할 수 있는 존재임을 칼스버그는 보여 주고 있다.


칼스버그가 더 나은 맥주를 만들었는가? 아마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는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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