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코끼리가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난 초록 요정이에요. 음악 소리에 언덕은 잠을 깨네
영화 물랑루즈에서 크리스티앙과 샤틴의 비극적 사랑은 초록 요정의 노래로 시작된다. 이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초록 요정의 마법에 홀리곤 했다. 이 요정은 종종 예술적 영감을 건네기도 했지만 더러는 삶을 파국으로 내몰았다. 이 초록 요정의 또 다른 이름은 압생트였다. 헤밍웨이는 압생트를 ‘오후의 죽음’으로 표현했고 고흐는 이 술을 마시고 자신의 귀를 잘랐다.
압생트는 진(Gin)의 한 종류로 쑥, 살구씨, 아니스 같은 향신료와 함께 증류한 허브 향과 50~70%의 높은 알코올 도수를 가진 스피릿이다. 가난한 노동자와 예술가들은 숙성이 필요 없고 가격이 저렴한 압생트를 애용했다. 이들은 초록색 압생트에서 홀연히 나와 자신을 유혹하는 초록 요정을 사랑했다. 하지만 이 요정은 현실 속에서 수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트는 이런 압생트의 위험을 알리기 위해 진 레인과 비어 스트리트라는 판화를 통해 맥주를 마시는 사회가 더 건강하고 부유하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1919년 벨기에에서도 압생트에 대한 금주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벨기에 맥주 전문가 제프 반 덴 스틴(Jef van den Steen)은 이 금주령 덕에 벨기에 맥주의 알코올 도수가 높아졌고 맥주가 다른 주류에 비해 높은 시장 점유율을 갖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제프 반 덴 스틴의 주장에 대한 여러 반론도 있지만 경상도 정도의 면적과 1000만 명 남짓의 인구를 보유한 벨기에에 수백 개의 맥주 카페와 양조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높은 알코올 도수를 가진 벨기에 맥주 스타일 또한 즐비하다.
알코올 6~7%를 가진 벨지안 브라운 에일과 두벨은 약과다. 8~9% 알코올을 가진 벨지안 다크 스트롱 에일, 골든 스트롱 에일, 트리펠과 10~11% 알코올을 지닌 콰드루펠 같은 맥주도 있다. 분명 벨기에가 다른 유럽 국가와 구분되는 특이한 맥주 문화를 가지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다양한 맥주들 중 압생트만큼 위험한 매력을 가진 맥주가 존재한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초록 요정이 아닌 분홍 코끼리가 있다는 점, 그리고 초록 요정이 파멸을 가져오는 반면 분홍 코끼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라벨의 분홍 코끼리가 귀엽다고 이 맥주를 얕보면 큰일 난다. 델리리움 트레멘스(Delirium Tremens), ‘알코올 진전 섬망’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델리리움 트레멘스(Delirium Tremens)는 장기간 음주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를 중단했을 때 겪는 환각을 의미한다. 일종의 알코올 후유증으로 괴물과 작은 벌레 또는 동물이 보이는 부작용을 경험한다고 알려졌다. 왜 맥주가 이런 불편한 의학 용어를 이름으로 갖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분홍 코끼리가 아이콘이라니, 도대체 이 맥주의 정체는 무엇일까?
델리리움 트레멘스를 만드는 휘게(Huyghe)는 1902년 레온 휘게가 벨기에 겐트에 있는 작은 양조장을 인수하며 시작된다. 이후 세계 대전과 경제 공황 같은 격랑에도 살아남으며 꾸준히 성장했지만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무난한 라거와 다른 나라에서 위탁받은 맥주를 양조하는 평범한 브루어리였다.
델리리움 트레멘스도 이태리에서 위탁한 ‘산 그레고리’(San Gregory)가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1988년 헤드 브루어인 패트릭 드 발레는 이태리에서 맥주 위탁 생산을 의뢰 받는다. 높은 알코올을 지닌 밝은 색 에일,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Belgian Golden Strong ale)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였다.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은 벨기에 효모가 만드는 섬세한 배향과 수지향 그리고 8~9% 알코올을 가진 황금색 에일을 의미한다. 1970년 벨기에 양조장 무르가트가 출시한 듀벨(Duvel)이 원조인 이 스타일은 과음의 위험성을 경고하듯, 대부분 맥주들이 듀벨(악마), 피랏(해적), 굴덴 드락(황금용) 등과 같은 강렬한 이름을 갖고 있다.
벨기에 맥주와 달리 ‘산 그레고리’라는 고명한 이름을 가진 이 맥주가 새로운 운명을 맞이한 건, 다름 아닌 세무 공무원 덕이다. 이들은 주세를 체크하기 위해 거의 매일 양조장을 방문했는데, 대표인 장 드 라트(Jean de laet)는 마침 이태리로 보내기 위해 만든 ‘산 그레고리’의 시음을 권했다.
공무원들은 아름다운 향미와 좋은 음용성을 가지고 있는 이 맥주에 반했고 어디서 구매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그러나 이 맥주가 이태리 위탁 맥주인 것을 알게 되자 조심스럽게 국내 출시를 권유했다. 부족한 자본으로 적극적인 영업이 부담스러웠던 장은 망설였다. 하지만 설득이 계속됐고 결국 벨기에 판매를 결정한다.
맥주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테스트를 진행하던 장은 한 펍에서 맥주의 콘셉트와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시음을 하던 한 손님이 이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나중에 술이 깨면 알코올 진전 섬망증, 즉 델리리움 트레멘스로 인해 용이나 새 그리고 코끼리가 보일 것 같다고 농담을 했고 이를 듣던 사람들이 차라리 델리리움 트레멘스를 맥주 이름으로 쓰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아니, 의학 용어, 더구나 알코올 후유증을 뜻하는 이름을 맥주에 붙이라니,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까딱하다간 사회적으로 큰 리스크를 질 수도 있었지만 장은 마케팅에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고, 고심 끝에 델리리움 트레멘스라는 유래 없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델리리움 트레멘스라는 전대미문의 작명에 용기를 얻은 것일까? 장은 아예 라벨도 이와 연관된 것으로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자본이 넉넉지 않았기에 겐트 대학생에게 맥주 두 박스를 대가로 델리리움 트레멘스와 관련된 동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용, 새, 악어 그리고 분홍 코끼리가 있는 라벨 디자인을 받게 된다.
맥주병도 창고에 있던 재고를 사용했다. 독일 위탁 맥주를 위해 구매했던 병 중에 아이보리색 도자기 병이 남아 있었고 장은 벨기에에서 보기 힘든 이 병에 델리리움 트레멘스를 담기로 했다. 이름도, 라벨도 그리고 맥주병도 그간 볼 수 없었던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이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8.5% 알코올과 불투명한 황금색, 풍성한 거품을 지닌 델리리움 트레멘스는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의 교과서와 같다. 효모가 만드는 산뜻한 배향과 옅은 페놀릭, 그리고 몰트에서 나오는 섬세한 꿀 향은 모방하기 쉽지 않은 매력이다. 게다가 적당한 단맛과 쓴맛이 만들어내는 멋진 균형감과 섬세한 탄산 뒤에 있는 묵직한 바디감은 높은 알코올 도수에도 이 맥주를 여러 잔 마실 수 있게 한다.
이 미증유의 맥주는 출시하자마자 벨기에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고 분홍 코끼리는 맥주 역사 상 가장 유명한 마스코트가 되었다. 현재 이 코끼리는 전 유럽은 물론 한국, 일본, 중국과 같은 동아시아, 북미와 남미를 비롯해 전 세계를 분홍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현재 휘게는 벨기에에서 7번째로 큰 양조장으로 성장했다. 일찍부터 태양광 발전과 같은 친환경 에너지 사용을 하고 있으며 오폐수 처리시설에 크게 투자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장애인들을 적극 고용하고 벨기에 전통문화에 많은 후원도 진행하고 있다. 이는 자본에 지배받지 않고 전통과 철학을 지킬 수 있는 가족 기업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압생트의 초록 요정처럼 이 맥주를 마시면 분홍 코끼리를 볼 수 있을까? 그런 건 기대조차 하지 말자. 맥주를 평생 친구로 삼고 싶으면 분홍 코끼리는 상상 속의 동물로 남겨두자. 우리는 알코올 진전 섬망증이 아닌 델리리움 트레멘스라는 멋진 맥주를 즐기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