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과연 벨기에 윗비어의 원조일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홍상직은 홍길동이 하직 인사를 하던 밤 마침내 호부호형을 허한다. 의적 활동 후 조선을 떠나 율도국 왕이 된 홍길동은 아버지가 죽자 자신의 나라에 묘를 마련한다. 만약 홍상직이 그때 호부호형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소설의 끝이 아버지에 대한 복수극이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은 무리인걸까?
호가든(Hoegaarden)과 셀리스 화이트(Celis White). 여기 기구한 운명을 가진 두 맥주가 있다. 홍상직의 두 아들 홍인형과 홍길동처럼 두 맥주는 같은 양조사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벨기에 밀맥주를 대표하는 두 맥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맥주 여신이 쓰는 이 소설의 끝은 복수극일까? 아니면 해피엔드일까?
15세기 벨기에 플랜더스 지역 수도사들이 생밀을 재료로 멋진 맥주를 개발했다. 이들은 오렌지 껍질로 신맛을 냈고 고수 씨앗을 넣어 쌉쌀함을 더했다. 이 맥주는 호가든이라는 작은 마을로 전파됐고 1709년 13개였던 양조장은 불과 20년 만에 36개까지 늘어나며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 벨기에 밀맥주도 19세기 라거의 침공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957년 마을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톰신(Tomsin) 브루어리가 문을 닫자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렇지만 맥주 여신은 이 맥주의 몰락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부활의 표식을 한 사람의 기억 속에 남긴다. 바로 피에르 셀리스(Pierre Celis)였다.
젊은 시절 양조장 근처에 자라며 종종 맥주 만드는 일을 도왔던 피에르 셀리스는 사라진 전통주를 부활시키기로 결심한다. 벨기에 밀맥주의 재료와 양조 방법은 일반적인 맥주와 사뭇 달랐지만 다행히 그는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빌린 돈으로 구입한 허름한 구리 케틀로 셀리스 브루어리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1965년, 희고 상큼한 향미를 지닌 밀맥주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맥주의 이름은 호가든이었다.
피에르 셀리스는 보리 맥아, 생밀, 큐라소 오렌지 껍질, 고수 씨앗과 같은 전통 재료와 방법으로 벨기에 윗비어를 부활시켰다. 밝고 불투명한 황금색은 부드러운 밀을 연상하게 했고 섬세한 오렌지 향과 은근한 향신료 향은 독특함을 선사했다. 가볍지만 우아하고 특별하지만 마시기 편한 이 맥주에 세간 사람들은 금방 매료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요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작은 시설로는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양조장을 확장하기로 결심한 피에르 셀리스는 1979년 레모네이드 공장을 인수한 후 ‘클루이스(Kluis)'라는 이름을 붙였다. 네덜란드어로 수도사의 작은 방을 의미하는 클루이스는 벨기에 윗비어를 창조한 선지자들에 대한 헌정이었다. 곧 새로운 양조장의 생산량은 30만 배럴에 달했고 미국 수출도 예정됐다. 맥주 여신의 표식을 외면하지 않은 그의 앞길은 탄탄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1985년 승승장구하던 호가든에게 재앙이 일어난다. 화재였다. 불은 양조장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불행히도 화재 보험이 없었던 피에르 셀리스는 재기를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때 오래전부터 호가든의 가능성을 눈여겨보던 누군가가 다가왔다. 현재 오비맥주의 모기업, 에이브이 인베브(ABInveb)의 전신인 인터브루였다. 피에르 셀리스는 그들이 제시하는 금액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기업에 지분을 넘긴 대가는 혹독했다. 호가든을 대중맥주로 만들고자 했던 인터브루는 대량 생산을 위한 공장 이전과 레시피 변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피에르 셀리스는 이런 인터브루의 요구에 지쳐갔다. 작지만 개성 있는 맥주를 만들고자 한 그의 철학과 상반된 방향이었다. 고집을 꺾고 돈과 명예를 좇을 수 있었지만 끝내 모든 지분을 넘기고 호가든 운영에서 손을 뗀다. 상처를 입은 피에르 셀리스는 벨기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마 자신의 자식을 빼앗은 인터브루와 함께 있는 것이 힘들었으리라. 아니면 영혼을 팔아넘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결국 피에르 셀리스는 1990년 가족과 함께 미국 텍사스 오스틴으로 건너갔다.
호가든은 거대 맥주 기업이 된 에이브이 인베브 밑에서 세계적인 맥주로 성장했다. 오리지널 벨기에 윗비어로 명성을 떨치며 유럽, 아시아, 미국에서 사랑받았다. 호가든의 성공으로 벨기에 다른 양조장도 윗비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우아한 벨기에 밀맥주는 호불호가 없었고 특히 여성들이 선호하는 맥주 스타일 중 하나가 된다.
한국에서는 오비맥주 산하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다. 한때 한국 마트와 편의점에 있던 호가든은 ‘오가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오비에서 만든 호가든은 오렌지 껍질과 고수 씨앗이 들어있지 않아 벨기에 윗비어 특유의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오가든은 이런 한국 호가든을 비아냥대던 이름이었다. 2010년대 들어 벨기에에서 수입되던 호가든은 현재 오비 양조장에서 만들고 있다. 물론 지금은 오가든이 아닌 호가든으로 불러도 될 만큼 품질을 갖고 있다.
한편 피에르 셀리스는 오스틴에서 재기를 꿈꿨다. 1992년 딸 크리스틴과 함께 셀리스 화이트라는 이름의 양조장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맥주를 만들기 시작한다. 양조장 한쪽에는 미국을 건널 때 양말에 숨겨 온 효모가 배양되고 있었다. 그의 DNA를 품은 또 다른 아이가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셀리스 화이트는 호가든이 가졌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희뿌연 황금색, 섬세한 오렌지와 향긋한 향신료 향, 부드럽고 우아한 바디감과 기품 넘치는 목 넘김까지 오리지널 벨기에 윗비어의 특징을 빠짐없이 갖고 있다. 대기업 밑에서 마시기 편한 모습으로 바뀐 호가든과 달리 셀리스 화이트는 더 진하고 부드럽다. 이는 밀을 다루는 전통적인 양조 방법 때문이다.
전통적인 벨기에 윗비어에는 더 뽀얗고 부드러운 밀의 느낌을 내기 위해 터비드 매쉬(Turbid mash)라는 방법이 사용된다. 터비드 매쉬는 생밀에서 나오는 맥즙을 따로 뽑는 전통 방식으로 신맛이 강한 벨기에 람빅에서 주로 사용하는 공법이다. 생밀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밀의 느낌과 희뿌연 불투명함을 살릴 수 있으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흔히 사용되지 않는다.
피에르 셀리스는 자신의 밀맥주에 이 전통적인 방법을 적용한 반면 대기업 맥주 호가든은 합리적인 가격을 위해 대량 생산 방식을 따르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론을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셀리스 화이트는 전통과 프리미엄을, 호가든은 대중성과 가성비에 가치를 두고 있을 뿐 정답은 없다.
텍사스 태생 셀리스 화이트는 평론가와 고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수한 품질과 원조 벨기에 윗비어라는 가치와 함께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해나갔다. 하지만 불행히도 재정 문제가 불거졌고 결국 1995년 또 다른 공룡 기업 사브 밀러에게 지분을 매각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사브 밀러는 에이브이 인베브에 대항할 벨기에 윗비어가 필요했고 셀리스 화이트를 최적의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시의적절한 시점에 셀리스 화이트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브 밀러는 셀리스 화이트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있지 않았다. 기대했던 수익이 나오지 않자 2001년 사브 밀러는 셀리스 화이트의 문을 닫았다.
피에르 셀리스는 2011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자신이 낳은 두 자식, 호가든과 셀리스 화이트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뜻과는 달랐지만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세계적인 맥주가 된 호가든에는 애증 어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반면 미국에서 애지중지하며 키운 둘째가 사라졌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으리라.
사업적인 평가와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피에르 셀리스가 걸어온 길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벨기에 윗비어라는 맥주를 책 속에서만 만나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호가든이든 셀리스 화이트든 그의 용기와 도전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고 그 자체만으로 피에르 셀리스는 전설로 불릴 자격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난 2017년, 셀리스 화이트가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보였다. 크래프트베브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가 이 브랜드를 되살리기 위해 투자를 한 것이다. 피에르 셀리스의 유산을 이대로 보낼 수 없었던 크리스틴도 기꺼이 합류했다. 이들이 셀리스 화이트라는 상표권을 획득하자 다시 양조장 전원에 불이 들어왔다.
2018년 크리스틴이 양조사의 길을 걷는 그의 딸 데이토나와 함께 한국에 왔을 때 셀리스 화이트의 부활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맥주가 피에르 셀리스의 적자임을 강조했고 벨기에 윗비어의 원조라는 자부심을 내보였다. 그녀가 제시한 새로워진 셀리스 화이트 로고가 이를 입증하고 있었다. 로고 속에는 명예와 힘을 상징하는 셀리스 가문의 곰과 부와 신념을 상징하는 호가든 마을의 지팡이를 든 손을 볼 수 있다. 그녀가 아버지의 꿈을 이어갈 수 있을까? 쉽지 않겠지만 진심을 맥주에 녹여낼 수 있다면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가치를 담아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맥주 여신의 변덕과 심술은 아버지가 같은 두 맥주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벨기에 태생이지만 서자의 운명인 호가든과 적자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셀리스 화이트, 이 둘의 사이에는 여전히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건 호가든에게 호부가 허락됐다는 사실이다. 호가든 홈페이지에는 아버지 피에르 셀리스 이름을 볼 수 있다. 자기의 뿌리가 어디인지 아는 것은 정체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호가든이 이를 부정한다면 그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맥주 여신이 쓰는 이 소설의 끝은 해피엔드였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셀리스 화이트가 호가든을 형이라 부를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맥주가 서로를 존중한다면 냉혹한 비즈니스에서 맥주가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낭만으로 기억될 것이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