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 영국 IPA를 탄생시키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 ; 우연히, 뜻밖에 얻은 행운
종종 의도치 않은 행운은 인류를 발전시켰다. 1928년 영국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배양된 포도상구균 뚜껑을 닫지 않아 페니실린을 발견했고 1945년 겨울 물리학자 퍼시 스펜서는 바지 속에서 녹아내린 초콜렛을 통해 전자레인지를 발명했다. 인류의 발명품 중 30%는 우연이 가져다준 행운이었다.
우연과 행운의 역사는 맥주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먹다 남은 빵과 곡물죽에서 태어난 맥주는 이미 위대한 ‘세렌디피티‘다. 하지만 맥주 세계의 세렌디피티는 요술 램프 속 지니의 선물과 다르다. 특히 대영제국 시기 탄생한 인디아 페일 에일(IPA)은 우연한 행운의 대가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인도를 품은 영국 맥주에게 세렌디피티는 복이었을까? 아니면 독이었을까?
인도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다. 인도의 목화는 증기기관과 방적기를 만나 산업혁명의 기틀이 되었다. 인도와 관계가 깊어질수록 수많은 영국인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바다를 건넜다. 더운 나라로 간 이주민들은 맥주가 필요했지만 당시 인도는 맥주를 만들 재료와 시설이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런던 템스 강을 떠나는 화물 품목에서 맥주는 필수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1752년 런던 템스 강 한 구석에서 양조장을 시작한 조지 호지슨은 사업 기회를 찾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양조장에 비해 그의 맥주는 아직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이때 첫 번째 세렌디피티가 찾아왔다. 양조장이 동인도회사 화물선 부두 근처에 있었던 덕분에 해운회사 이스트 인디아맨(East Indiamen)이 인도로 보낼 맥주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접했던 것이다.
대형 양조장의 구애가 있었지만 이스트 인디아맨은 호지슨과 계약을 맺었다. 가장 큰 이유는 호지슨이 제공한 18개월의 장기 어음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에서 인도로 가기 위해서는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이스트 인디아맨 입장에서 물건 판매 대금을 최대 18개월까지 미룰 수 있는 건 대단한 이득이었다. 대형 양조장은 이런 조건에 인색했고 가격도 높았다. 경쟁이 치열한 런던을 벗어나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던 호지슨도 이스트 인디아맨의 요구를 기꺼이 수용했다.
영국에서 인도로 가는 맥주들은 다양했다. 까만색 맥주 포터를 비롯해 알코올이 낮은 스몰비어와 높은 알코올을 가진 옥토버비어가 대서양과 인도양을 건넜다. 하지만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맥주는 외부 미생물에 취약한 나무 배럴 안에서 적도를 두 번이나 겪어야 했고 수개월의 시간을 버텨야 했다.
영국 양조사들은 해결책을 이미 알고 있었다. 홉과 알코올이었다. 홉이 가지고 있는 폴리페놀은 항산화 역할을 했고 높은 알코올은 외부 미생물로부터 맥주를 보호했다. 인도로 가는 모든 맥주는 상대적으로 알코올 도수와 쓴맛이 강했고 진한 홉 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호지슨에게 두 번째 세렌디피티가 다가왔다.
당시 인도에 도착한 맥주는 경매를 통해 판매되었다. 어떤 양조장의 맥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개월 동안 배 안에서 버틴 맥주들의 맛과 품질만이 경매의 핵심이었다. 그때 한 맥주가 경매사의 눈을 번뜩이게 만들었다. 바로 호지슨의 옥토버비어였다. 인도로 가는 여정을 버티기 위해 다량의 홉이 들어간 이 맥주에 놀라운 변화가 생긴 것이다. 색은 밝아졌고 향은 우아했으며 맛에는 기품이 있었다. 적도를 거치며 조성된 온도 변화와 의도치 않은 장기 숙성은 호지슨의 옥토버비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최고의 맥주로 만들었다.
호지슨 맥주는 인도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 맥주에 매료된 사람들은 호지슨과 다른 맥주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프리미엄도 붙었다. 1801년 인도 캘커타 가제타에 실린 호지슨 맥주 광고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게재됐다.
호지슨 맥주가 도착했습니다. 미리 입금된 금액에 따라 분배됩니다.
인도에서 호지슨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고 최초의 맥주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인도에서 호지슨의 성장은 놀라웠다. 1801년 1000배럴이었던 수출량은 1810년에는 4000배럴로 뛰었다. 1817년에는 런던에 있는 양조장도 확장했다. 호지슨 창조한 이 맥주 스타일은 영국 본토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런던의 많은 양조장은 ‘인도 기후에 마시기 적합한 페일 에일’, ‘인도 시장을 위해 준비된 페일 에일’, ‘인디아 에일’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호지슨 스타일 맥주를 판매했다. 웨스트 인디아라고 불렸던 호주와 신대륙 미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시대와 시간이 건넨 뜻밖의 행운은 보잘것없던 런던의 작은 양조장을 누구나 주목하는 곳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1821년 손자 프레데릭 호지슨이 사업을 맡으며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과도한 욕심을 부렸다. 이스트 인디아맨에게 주던 장기 어음을 철회하고 현금을 요구한 것이다. 또한 가격도 20% 인상했다. 인도에서는 도매가를 매우 낮게 책정하여 경쟁사의 진입을 원천 봉쇄했다. 세렌디피티를 만용으로 바꾼 프레데릭 호지슨의 선택은 결국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왔다.
1822년 동인도 회사 해운부문 이사인 캠밸 메이져리뱅크스는 런던에서 비밀리에 사무엘 알솝을 만난다. 사무엘 알솝은 런던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버튼 온 트렌트‘라는 도시에서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만드는 맥주는 알코올이 높고 묵직한 단맛이 나는 버튼 에일이었다. 알솝은 오랫동안 자신의 맥주를 러시아에 수출해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전쟁으로 과도한 관세를 부과하자 대안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캠밸은 알솝에게 호지슨 맥주를 건네며 비슷한 맥주를 만들어 달라고 제안했다. 버튼 에일은 호지슨 맥주와 달리 홉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제안은 모험에 가까웠다. 하지만 당장 수출길이 막힌 알솝에게 천금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샘플 양조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국 맥주 시장을 뒤바꿨다.
놀랍게도 알솝이 만든 인디아 에일은 호지슨의 것보다 더 밝았으며 더 섬세한 홉향과 쓴맛이 났다. 가장 큰 원인은 물이었다. 황산염이 풍부한 버튼의 경수는 런던의 경수보다 밝은 색에 유리했고 깔끔한 홉 향을 이끌어냈다. 물론 당시에는 물의 조성에 대한 화학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참 뒤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1823년 버튼 인디아 에일이 출시되자 시장은 단번에 뒤집어졌다. 동인도회사의 지원을 업은 알솝은 인도 시장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알솝의 경쟁사였던 바스 또한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세렌디피티 여신이 호지슨이 아닌 버튼을 향해 손길을 내민 것이다.
1832년 인도 시장에서 호지슨의 점유율은 28%까지 떨어진다. 1등은 43%의 바스였고 3등은 12%의 알솝이었다. 1841년 호지슨의 점유율은 6.5%까지 곤두박질쳤다. 바스와 알솝은 각각 29%와 36%로 시장을 양분했다. 1849년 결국 호지슨은 문을 닫는다. 할아버지가 얻은 뜻밖의 행운은 손자의 어리석은 욕심 때문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호지슨의 자리는 버튼 IPA가 대체했다. 아니 대체한 정도를 넘어 영국 맥주 시장을 통째로 흔들었다. 1839년 런던과 버튼 온 트렌트 사이에 기찻길이 연결되며 운송요금이 3분의 1로 떨어지자 버튼 양조장은 본격적으로 런던 시장에 진출했다. 아름다운 앰버 색과 쌉쌀하고 깔끔한 홉 향을 지닌 버튼 맥주는 어둡고 묵직한 런던 맥주를 압도했다. 특히 포터를 마시는 노동자와 구분되기를 원했던 귀족과 자본가들은 이 맥주에 환호했다.
런던의 거대 양조장들은 버튼 스타일을 따라 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19세기 말에야 버튼의 물이 그 비밀임을 알아냈고 물의 조성을 바꾸는 기술, 즉 버트니제이션(Burtonization)을 본격적으로 양조에 사용했다. 1837년부터 높은 알코올 도수와 강한 쓴맛 그리고 쌉쌀하고 풀과 같은 홉 향을 지닌 이 맥주에 인디아 페일 에일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붙게 된다. 대영제국과 산업혁명 뒤에 있던 세렌디피티 여신은 이렇게 영국의 정체성을 가진 맥주를 세상에 내놓았다.
19세기 후반 세계를 지배하던 영국 맥주는 큰 도전을 받게 된다. 더 밝고 깔끔하고 깨끗한 황금색 라거는 무섭게 IPA의 자리를 치고 들어왔다. 신흥국 독일과 미국은 라거를 통해 전 세계 맥주 시장을 장악했다. 더구나 세계 대전은 영국 맥주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세수가 부족했던 영국 정부는 알코올 도수에 세금을 붙여 맥주를 약하게 했고 향미 또한 모호하게 만들었다.
IPA는 라거의 홍수 속에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한때 런던을 주름잡았던 바스와 알솝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2000년대 들어 영국은 화려하고 강력한 미국 IPA에게 왕좌를 빼앗긴다. 여전히 5~5.5%의 평범한 알코올, 중간 이상의 쓴맛과 건초 같은 홉 향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IPA는 전통적인 멋과는 별개로 트렌드에서 다소 멀어져 있다. 다시 힘을 내기 위해서는 세렌디피티 여신의 힘이 필요한 듯 보이지만, 그 시간은 아득히 멀게 만 느껴진다.
1758년 영국 테드케스터에서 시작한 사무엘 스미스는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이다. 사무엘 스미스 인디아 에일은 이름부터 19세기 런던에서 판매되던 IPA를 연상케 한다. 라벨 또한 빅토리아 여왕 시절 황실과 계약에 사용되었던 사무엘 스미스 상호 디자인에서 가져왔다. 라벨 속 인도 풍 건물과 그 앞에 도열한 무리들은 한 때 화려했던 영국의 단면을 상징하는 것 같지만 오래되어 빛바랜 사진처럼 보일 뿐이다.
영국 노닉 글래스 속 인디아 에일은 투명한 앰버 색을 띠고 있다. 5%의 알코올은 이제 IPA라고 하기에 다소 무색하다. 지금의 영국 IPA는 숙성이 중요했던 19세기 IPA와 전혀 다르다. 건자두 같은 에스테르 뒤로 꽤 강한 쓴맛이 혀를 짓누른다. 하지만 묵직하지 않고 깔끔하다. 맥주는 목 뒤로 넘어가며 조금씩 건초와 풀 향을 비강으로 밀어낸다. 전형적인 영국 홉이 가진 모습이다. 향은 여릿하고 희미하다. 하지만 이게 영국 에일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기억해두자.
뜻밖의 행운도 결국 노력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IPA는 또렷이 보여준다. 운에 취해 만용을 부리는 자가 보인다면 IPA 한 잔을 권해보자. 맥주에 취하는 것이 그보다 더 나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