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도시는 문화공동체다.
철과 피만이 독일의 통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노이마르크트 광장의 성모교회는 마치 드레스덴의 수호자처럼 보였다. 교회 한쪽에는 우아한 바로크 양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폭격으로 까맣게 그을린 벽과 기둥이 흉터처럼 남아있었다. 그제야 교회 앞에 있는 루터가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는 종교개혁보다 평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때 ‘엘베 강의 피렌체’라고 불리던 작센의 주도 드레스덴은 독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아픔과 기적을 품고 있는 도시다.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 뒤에는 독일제국의 탄생, 연합군의 대폭격, 동독 치하의 암흑기 그리고 재통일 이후 복원까지 독일 역사의 영욕이 응축되어 있다. 이런 드레스덴의 굴곡진 역사를 기억하는 이가 남아있을까?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이 도시의 고통과 허물을 기꺼이 품고 있는 존재가 있다. 드레스덴의 맥주, 라데베르거(Radeberger)다.
독일 최초의 황금빛 라거, 철의 수상 비스마르크가 가장 사랑한 맥주, 화려한 수사를 가진 라데베르거는 독일 역사 상 가장 중요한 맥주 중 하나다. 드레스덴의 역사가 조금만 달랐어도 지금 독일 최고의 맥주 도시는 뮌헨이 아닌 드레스덴이 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도시와 맥주 사이에 숨어있는 것일까? 독일 제국과 함께 태어난 라데베르거는 어쩌면 시작부터 격동의 세월을 겪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1871년 유럽 대륙에 거대한 폭풍이 일어났다. 9세기 프랑크 왕국 이후 잘게 쪼개져 있던 게르만인들이 1000년 만에 독일을 통일시킨 것이다. 하나의 독일이라는 대업을 이룬 주역은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와 총리 비스마르크. 북독일 연방을 이룬 그들은 보불전쟁에서 승리하며 과거 프랑스에게 당한 치욕을 되갚았다. 다른 곳도 아닌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한 것은 60년 전 나폴레옹에게 받은 굴욕에 대한 철과 피의 복수였다.
철은 프로이센에게 겸손과 절제 그리고 강인한 정신을 상징하는 금속이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린 후, 자신에게 대항하는 프로이센을 극한으로 몰아갔다. 프랑스 군의 공격으로 러시아 국경까지 밀려난 프로이센 왕실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나폴레옹은 전쟁 배상금으로 프로이센 영토와 국민 절반을 러시아와 작센에게 나눠 주었고 이런 치욕 속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는 고통을 인내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절제와 절약 그리고 불굴의 정신이 필요했다. 프로이센 왕실과 국민들은 금과 같은 값비싼 금속 대신 철로 만든 장신구를 두르며 재기를 꿈꿨다. 나폴레옹과 전쟁에서 조금씩 희망이 보이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과거의 훈장을 모두 폐지하고 철십자 훈장을 제정했다. 그리고 출신과 상관없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모든 이에게 이 훈장을 수여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승리 이후 1815년 워털루에서 프로이센은 드디어 나폴레옹을 패퇴시킨다. 철의 정신은 프로이센을 강력한 신흥국으로 만들었지만 아울러 철십자 훈장은 사라졌다.
철십자 훈장이 다시 등장한 시기는 프로이센이 격변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였다.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철십자 훈장을 부활시키며 철과 피만이 독일 제국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창했다. 프로이센에게 철은 절제와 강한 정신이었지만 독일 제국에게는 무기와 경제였다.
프로이센 주도로 만들어진 북독일 연방은 1871년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치른다. 게르만인의 민족성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된 이 보불전쟁의 승리는 독일의 통일을 의미했다. 곧 남부 독일을 대표하는 바이에른이 합류하자 마침내 독일 제국이 탄생했다. 제국의 첫 수상이 된 비스마르크는 냉정하고 과감한 결정을 통해 근대 독일의 기틀을 쌓았다. ‘철의 수상’으로 불리며 냉철하기 그지없던 비스마르크였지만 애정을 아끼지 않는 맥주가 있었다. 라데베르거였다.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맥주, 라데베르거는 폐허가 되어 먼지 밖에 남지 않았던 이 도시의 기적과 같은 맥주다. 1872년 이 맥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독일에는 황금색 라거가 존재하지 않았다. 1842년 체코 플젠에서 최초의 황금색 라거 필스너 우르켈이 독일 양조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30년 간 독일 누구도 밝은 색 라거를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
1871년 통일 독일이 가져다준 자신감이었을까? 드레스덴에서 20km 떨어진 작은 도시 라데베르그에서 구스타프 필립, 막스 룸펠트, 플로렌츠 율리우스 숀, 칼 헤르만 라쉐 그리고 하인리히 밍키위츠, 5명의 남자가 모여 독일만의 황금색 라거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체코에서 가져온 레시피로 필스너 우르켈을 따라잡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결과는 마땅치 않았다.
그 이유는 물이었다. 미네랄이 없는 연수가 밝은 색 맥주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대부분 독일의 물은 경수였다. 라데베르거 양조사들은 적합한 물을 찾기 위해 지역의 모든 수질을 조사했고 우연히 카스발트 숲의 물이 연수인 것을 알아냈다. 드디어 독일에서도 황금색 라거, 필스너를 양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라데베르거는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드레스덴의 맥주지만 베를린 공식 행사에는 항상 라데베르거가 등장했다. 1887년 비스마르크는 이 맥주를 ‘수상의 맥주’(Beer of Chancellor)로 명명하며 최고의 권위를 부여했다. 명실상부 독일 제국을 대표하는 맥주가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라데베르거는 고향 드레스덴과 함께 암흑의 길로 들어선다.
1945년 2월 13일 밤, 연합군은 사흘 내내 드레스덴에 폭격을 진행했다. 3900톤 이상의 고폭탄과 소이탄이 도시 한복판에 떨어졌다. 연합군은 독일 군사와 산업시설을 향한 공격이었다고 주장했지만 화염은 시민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집어삼켰다. 드레스덴의 찬란함을 증명하던 궁정, 교회와 성당, 박물관과 오페라 하우스 심지어 일반 가옥들이 모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사망자만 35,000명에 달했고 실종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드레스덴을 방문했을 때, 폭격 전후를 비교한 사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폭격을 맞고 사라진 성모교회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아픔의 흔적은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됐다. 동독의 도시가 된 드레스덴은 치유되지 못했다. 국민들은 복구를 요청했지만 재정이 부족했던 동독은 무기력했다. 최초의 독일 필스너라는 위대한 역사를 가진 라데베르거 또한 국유화되며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독일이 재통일 되고 나서야 드레스덴의 복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성모교회를 비롯해 오페라 하우스, 츠빙거 궁전과 같은 건축물들이 새로 지어졌다. 2000년대 들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19세기 모습을 되찾았지만 참혹했던 과거의 모습은 지금도 남아있다. 드레스덴 역사적 구시가에 들어섰을 때 화려한 건물 사이로 폭격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성모교회는 군데군데 검은색 상흔을 갖고 있었고 가톨릭 궁정성당의 첨탑 또한 검게 그을려 있었다.
라데베르거 또한 1989년 이후 부활의 기지개를 켠다. 프랑크푸르트 맥주 회사 빈딩(Binding)은 동독 정부 소유였던 라데베르거를 인수한 후 곧 대대적인 시설투자를 시작했다. 재미있는 건 매수자 빈딩이 오히려 사명을 라데베르거라고 바꿨다는 사실이다. 독일 맥주에서 라데베르거가 어떤 가치와 위상을 지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사례다.
한국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수없이 마셔본 이 맥주를 고향 드레스덴에서 만나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고블릿 잔에 담겨 나온 라데베르거는 아름다웠다. 쨍할 정도로 투명한 황금색과 끊임없이 올라오는 기포는 참을 수 없는 갈증을 일으켰다. 기다리지 못하고 한 모금 마시자 깔끔한 목넘김과 함께 독일 홉에서 나오는 건초 같은 향이 슬며시 비강을 물들였다.
독일 필스너는 체코와 미묘하게 다르다. 홉 향은 더 또렷하고 쓴맛은 섬세하다. 쨍한 바디감과 깔끔한 목넘김은 편하지만 기품 있다. 체코 필스너가 조금 더 뭉툭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라면 독일 필스너는 날카롭고 존재감이 확실하다. 라데베르거 또한 쨍한 홉 향과 드라이한 바디감으로 자신이 독일 필스너의 원조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드레스덴이 어두운 과거를 겪지 않았다면 과연 뮌헨이 독일 최고의 맥주 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 뮌헨에서 처음 밝은 색 라거가 출시된 시기는 1894년이었다. 라데베르거가 출시된 1872년보다 무려 20여 년이 지나서야 뮌헨의 슈파텐에서 밝은 라거가 나온 것이다. 뮌헨 양조사들은 독일 필스너의 기준이 된 라데베르거에 질시를 느꼈을 수도 있다. 혹은 자신들이 그토록 만들고 싶었던 밝은 색 라거가 작센에서 출시된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뮌헨이 독일 맥주를 자신들의 문화로 꽃 피우고 있었을 때 드레스덴은 복구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드레스덴은 라데베르거 존재만으로 다른 어떤 도시보다 독일 맥주 성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데베르거가 최초의 독일 필스너라는 이유를 넘어, 이 맥주가 드레스덴의 한 부분으로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이다. 맥주와 도시가 어떻게 공동운명체가 될 수 있는지 라데베르거는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도시를 이야기하는 맥주가 있다는 건, 아직 그 문화를 갖지 못한 우리에게 어쩌면 가장 부러운 문화일지도 모르겠다. 프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