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아는가. 23세기 맥주에는 훈연 향이 가득할지
이 맥주는 아침 10시에 마셔야 해. 밖에서 마셔야지 진짜 밤베르크 스타일이지. 오늘 너는 진짜 밤베르크 사람이 된 거라고. 껄껄
맥주잔을 한쪽 난간에 올려놓으며 한스는 호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그란 안경 너머 보이는 그의 눈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작지만 다부진 체격과 전형적인 맥주 배를 가진 한스는 누가 봐도 맥주 사랑이 가득한 독일 사람이었다. 맥주 스승님이기도 한 그는 내가 자신의 고향 밤베르크에 온다고 하자 모든 일을 뒤로하고 달려온 것이다.
아침 10시 밤베르크 길 위에서 마시는 맥주라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스는 진정한 밤베르크식 아침 식사에는 신선한 샌드위치도 필요하다며 한 블록 너머에 있는 소시지 가게에서 레베케제와 빵을 사 가지고 왔다. 돼지 간으로 만든 레베케제는 스팸처럼 보였지만 식감이 부드럽고 육향이 풍부했다.
고동색 맥주와 레베케제 샌드위치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의심도 잠시 맥주 한 모금을 입에 넣자 마치 방금 숯불에서 꺼낸 듯 훈연 향이 비강을 가득 채우며 올라왔다. 담백한 빵과 짭짤한 레베케제 속에서 퍼지는 훈연 향은 이상하리만큼 어울렸다. 아마 유럽 길거리에서 경험한 최고의 아침 만찬이리라. 만족해하는 나를 보며 한스는 마치 고대 맥주의 비밀을 알려준 듯 우쭐한 얼굴로 남은 맥주를 비우고 있었다.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한 곳인 바이에른 밤베르크.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1000년 고도에 세계 어떤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맥주가 존재한다. 이 맥주에는 갓 구운 베이컨에서나 느낄 수 있는 향이 가득하다. 맥주에서 훈연 향이라니 가당하기나 한 소리인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17세기 전까지 모든 맥주는 이 꼬릿한 향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대전의 폭격을 맞지 않은 몇 안 되는 독일 도시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 도시인 밤베르크는 바이에른 북쪽 오버프랑켄에 있다. 우리는 뮌헨을 독일 맥주 도시로 알고 있지만 사실 오버프랑켄이야말로 독일 맥주의 중심지다. 200개가 넘는 양조장이 있는 이 지역은 세계에서 1인당 양조장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오버프랑켄을 대표하는 바이로이트, 쿨름바흐, 밤베르크는 오래된 맥주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로 작지만 다양한 맥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즐비하다. 전라도 사람들이 김치에 진심이듯 이들은 맥주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오버프랑켄 사람들에게 맥주는 종교와 같다.
밤베르크는 오버프랑켄 맥주들 사이에서 가장 독특한 맥주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10세기에 처음 이름을 드러낸 이 도시는 위치적으로 작센과 보헤미아와 가까워 문화 교류가 활발했다. 밤베르크를 역사의 중심으로 이끈 사람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였다. 오토기의 마지막 황제였던 하인리히 2세는 가톨릭 문화를 부흥하고 제국의 기초를 닦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런 그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가 밤베르크였다.
1002년 즉위한 하인리히 2세는 밤베르크에 특권을 부여하고 주교국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주교국이란 로마 교황청의 주교들이 지배하는 도시를 의미한다. 그는 독립적인 지위를 통해 밤베르크를 제국 핵심 도시로 세우고자 했다. 밤베르크 대성당은 이런 그의 의지가 집약된 곳이었다. 밤베르크 역사를 대표하는 이 성당은 사실 하나님에 대한 속죄의 결과물이었다.
1003년 하인리히 2세는 자신을 심각하게 위협했던 폴란드 공작 볼레슬라프를 제압하기 위해 이교도와 동맹을 맺는다. 보헤미아 공작이기도 했던 볼레슬라프는 동쪽 지역에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면서 황제의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1018년 결국 황제는 평화 조약을 맺으며 신성로마제국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하지만 이교도와의 동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는 밤베르크에 거대한 성당을 짓는 것으로 회개를 했다.
1024년 하인리히 2세는 아내 쿠니쿤데와 함께 자신에게 봉헌된 이곳에서 잠들었다. 유약한 체격에 다리까지 절었지만 하인리히 2세는 누구보다 제국 영토를 회복하고 기독교 문화를 발전시킨 황제였다. 밤베르크가 이런 그의 영혼이 깃든 곳으로 폭격을 빗겨 나 지금까지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온 것은 독일 황제 중 유일하게 성인으로 추대된 하인리히 2세의 사랑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구시가지로 들어가기 위해 레그니츠 강에 다다르면 다리 중간에 우뚝 솟은 구시청사를 만날 수 있다. 원래 시청은 도시의 중심에 있는 것이 상식 아닌가. 아무리 봐도 시청 건물이 구시가지 초입에, 그것도 강 중간에 있는 건 어딘가 어색하다. 이 뜬금없는 모습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주교국이던 밤베르크는 1803년 교회의 재산을 회수하는 세속화 이후 바이에른 소속이 된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 밤베르크에는 시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주교국에서 박탈된 밤베르크 성직자들이 시청을 지을 땅을 제공하지 않아 차선으로 강 위에 인공섬을 만든 후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구시청사를 관통하기 전 구릉 위에 있는 밤베르크 대성당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시내를 굽어보듯 웅장하게 서있는 대성당을 보니 시청 건물이 초라한 이유가 이해되었다. 기구한 사연이지만 지금은 밤베르크에서만 볼 수 있는 명소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구시가지에 들어서니 마치 중세 시대로 타임워프 한 듯 생경한 풍광이 펼쳐졌다. 마치 붉은색 지붕을 머리에 이은 듯한 독일식 건물들이 좁은 골목을 두고 줄지어 있었다. 흐린 날씨지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테라스는 중세에도 어울릴 것 같았다. 구시청사를 얼마 지나지 않아 보라색 꽃들이 난간에 만발한 건물이 보였다. 아침이었지만 그곳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오리지널 라우흐비어, 훈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슈렝케를라였다.
슈렝케를라는 슈페지알과 함께 전 세계 유이하게 라우흐비어(Rauchbier)를 이어가고 있는 양조장이다. 라우흐비어란 훈연 향이 나는 독일 전통 맥주를 뜻한다. 여기서 나오는 훈연 향은 맥아 때문이다. 맥아는 보리에 싹을 틔운 후 건조한 것으로 발효에 필요한 당을 제공하는 필수 재료다. 오랫동안 인류는 맥아를 얻기 위해 나무를 태워 보리를 건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자연스럽게 맥아는 나무의 연기를 입었고 훈연 향을 머금었다. 더구나 나무는 열을 조절하기에 적당하지 않아 대부분 맥아는 어두운 색을 띨 수밖에 없었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이 방법은 17세기 대전환을 맞는다. 1635년 영국인 니콜라스 할스가 석탄을 열원으로 사용하는 맥아 가마를 발명한 것이다. 석탄은 온도를 조절하기 용이했고 특별한 향도 만들지 않았다. 게다가 비용도 절약되었다. 이후 맥주는 더 이상 스모키 한 향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색도 밝아졌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던 양조 기술이 새로운 단계로 진보한 것이다. 전 세계 99%의 맥주가 이런 혁신에 동참하며 현대적인 모습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런 환경도 불구하고 전통을 고수한 양조장이 있었으니, 바로 슈렝케를라다.
슈렝케를라 라벨에는 1405년을 출발점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사실 본격적인 역사는 1767년 양조장을 인수한 볼프강 헬러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양조장 이름을 헬러 브루어리로 변경하고 양질의 맥주를 생산하기 위한 투자를 진행했다. 양조장의 법적 이름이 헬러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슈렝케를라라는 비공식적인 명칭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877년 안드레아스 그레이져가 양조장을 인수하고 난 뒤다.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있던 그는 걸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고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슈렝케른, 밤베르크 사투리로 절뚝거리는 사람으로 불렀다. 양조장 또한 슈렝케를라라는 별칭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라벨 한쪽에 있는 빨간색 인장 속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사람이 바로 안드레아스 그레이져다.
안드레아스는 충분히 현대적인 방법으로 맥주를 만들 수 있었지만 나무를 태워 맥아를 만드는 전통을 고수했고 현재까지 6대째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맥아 회사 바이어만이 바로 코 앞에 있음에도 여전히 직접 맥아를 생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전통이 그들의 정체성에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알 수 있다.
한스와 슈렝케를라 입구에서 마신 맥주는 슈렝케를라 메르첸이었다. 윗비어, 복비어, 도펠복 등 다양한 서브 카테고리를 자랑하는 슈렝케를라 맥주 중 메르첸은 가장 클래식한 스타일이다. 메르첸은 5~5.5%의 알코올과 앰버색을 가진 라거 맥주다. 섬세한 캐러멜 향과 부드러운 바디감이 이 스타일의 매력이다. 슈렝케를라 메르첸은 훈연 맥아로 만든 메르첸으로 짙은 훈연 향 속에 숨어있는 메르첸 고유의 특징을 품고 있다.
일반적인 메르첸에 비해 조금 더 어두운 마호가니 색을 띠고 있지만 빛이 투과될 정도로 투명하다. 맥주를 코에 대자 훈연 향이 물씬 올라온다. 슈렝케를라를 처음 접해보는 사람은 맥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낯선 향에 움찔할 수도 있다. 살짝 꼬릿한 향도 잠시, 부드럽게 넘어가는 맥주 뒤로 섬세한 캐러멜 향과 검은 과실의 힌트가 비강을 물들인다. 꿀꺽꿀꺽 들이키기는 어렵지만 참을 인자 세 개만 마음에 새기면 서서히 이 맥주의 향미에 익숙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하기 힘들면 음식이 천군만마가 될 수 있다. 소시지는 말할 것도 없고 구운 고기, 말린 육포는 훌륭한 파트너다. 구운 아몬드와 치즈도 빠질 수 없다. 굽고 볶는 데서 나오는 향미를 가진 음식은 슈렝케를라 메르첸을 친숙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매력이 이 맥주의 마력이기도 하다.
‘전통을 유지한다는 것은 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라는 독일 속담이 있다. 슈렝케를라에는 여전히 불씨가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맥주에 없는 어색한 훈연 향에도 꾸준히 슈렝케를라를 찾는 건 이 불씨의 정체를 이해하고 공유하고픈 무언가에 이끌렸기 때문 아닐까? 아니면 수천 년 간 맥주를 마셔왔던 인류의 DNA에 새겨진 흔적을 찾고자 하는 본능일 수도 있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라, 또 아는가. 23세기 맥주에는 훈연 향이 가득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