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야말로 원형 너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열쇠다.
양조장 벽이 부서지고 무거운 목재들이 떨어지면서 인근 주택의 벽과 지붕을 무너트렸고, 이게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더 타임즈> 1814년 10월 19일
4살 난 한나는 엄마 메리와 차를 마시기 위해 들떠있었다. 날은 쌀쌀했지만 10월 햇살이 비치는 월요일 오후는 모녀의 티타임을 위한 완벽한 시간이었다. 메리가 막 데운 차를 따르려던 찰나 갑자기 쾅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크기의 검은색 액체가 거실 벽을 무너트리며 밀려들었다.
찐득하고 퀴퀴한 이 액체는 순식간에 모녀를 덮쳤고 이내 좁은 런던의 골목을 가득 채웠다. 검은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아등거리며 버티는 사람들 사이로 거대한 나무통들이 난파된 범선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1814년 10월 17일 오후 4시 30분, 런던 한복판은 검은 지옥이었다.
런던 버킹엄 궁 북동쪽, 지금은 도미니언 극장이 있는 사거리에서 맥주 쓰나미가 발생했다. ‘런던 맥주 홍수(London Beer Flood)’라고 불리는 이 재앙은 8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차를 마시던 한나와 메리를 포함해 1층에 있던 아일랜드인 모자와 친지 5명, 그리고 근처 펍 뒤뜰에서 솥을 닦던 하인이 유명을 달리했다.
사고의 원인은 이들이 살던 세인트 자일 루커리 인근에 있던 홀스 슈즈 양조장(Horse shoes brewery)이었다. 1764년 설립된 이 양조장은 런던에서 다섯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6.7m 높이를 가진 거대한 나무통들에는 숙성 중이던 맥주가 가득 차 있었고 통에는 엄청난 압력을 견디기 위한 두꺼운 철제 밴드가 체결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사고 당일 한 나무통에서 철제 밴드가 풀어졌고 작은 틈 사이로 엄청난 압력과 함께 맥주가 터져 나온 것이다.
폭발의 충격은 양조장에 있던 모든 배럴에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한꺼번에 쏟아진 맥주의 양은 무려 백만 리터에 달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상자가 나온 이유는 홀스 슈즈 양조장 근처가 빈민층과 노동자가 거주하던 슬럼가였기 때문이다. 배수가 전혀 되지 않는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은 4m 높이로 들이닥친 맥주 홍수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8명이 죽고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지만 홀스 슈즈 양조장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우연히, 우발적으로, 운이 없어서’ 일어난 사고였다는 판결이었다. 어이없는 건, 양조장은 미리 낸 세금을 환급받아 파산을 피할 수 있었지만 죽은 이들에게는 한 푼의 보상금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년 전에도 자본에 천착한 권력은 힘없는 자들에게 잔인했다.
홀스 슈즈 양조장 나무통에 있던 맥주는 포터(porter)였다. 만약 런던 맥주 홍수를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면 흑색으로 뒤범벅되었을 것이다. 포터는 18세기 태어나 약 200여 년 간 영국과 전 세계를 호령한 다크 에일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건 포터의 뿌리가 대단한 맥주가 아닌 브라운 에일 칵테일이라는 사실이다.
단어 그대로 갈색을 띠는 브라운 에일은 특별한 캐릭터를 정의하기 어려운 맥주다. 오랫동안 영국의 에일 하우스와 양조 길드에서 만들어 온 스타일로 쓴맛과 향을 내기 위해 홉이 아닌 허브 혼합물인 그루트를 사용했다. 19세기까지 영국은 홉을 넣으면 비어(beer), 그렇지 않으면 에일(ale)이라고 구분했다.
18세기 초 여러 종류의 브라운 에일을 섞어 마시는 ‘쓰리 쓰레즈’(three threads) 방식이 유행한다. 펍에서 혼합되는 쓰리 쓰레즈는 일정한 품질과 맛을 보장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른 맥주가 만드는 독특한 향미와 경험을 제공했다. 때로는 오래되거나 오염된 맥주를 숨기는 편법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러 브라운 에일이 모인 결과물은 어떤 맥주보다 진한 색과 향을 띠었다. 이런 방식이 새로운 대세로 자리를 잡자 1722년 벨 브루어리 대표 랄프 하우드는 쓰리 쓰레즈를 아예 상품화하기로 결심했다. 양조 단계부터 쓰리 쓰레즈 공식을 따른 맥주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는 동일한 맥아에서 네다섯 번 추출한 맥즙들을 혼합한 후, 큰 나무 배럴에서 몇 개월 동안 발효와 숙성을 진행했다. 이렇게 양조된 맥주는 ‘인타이어 버트’(entire butt)라고 불리며 삽시간에 인기를 끌었다. ‘인타이어’는 여러 맥즙을 혼합하는 전자의 과정을, ‘버트’는 큰 나무 배럴을 일컫는 말이었다.
인타이어 버트는 브라운 에일과 달리 홉을 넣었기 때문에 에일이 아닌 비어(beer)로 구분되었다.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진행된 숙성에서 나오는 신맛과 쿰쿰한 향, 옅은 훈연 향과 낮은 쓴맛을 가지고 있었다. 음용성을 위해 종종 젊은 맥주와 오래된 맥주를 블랜드 해서 마시기도 했다. 쓰리 쓰레즈의 특성을 가졌지만 색과 향이 차별화된 맥주 스타일이었다.
18세기 중반 인타이어 버트는 포터라는 이름을 얻는다. 포터(porter)는 런던 템스 강에서 짐을 나르던 노동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왜 맥주에 짐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일까?
1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공업도시로 거듭난다. 일자리를 찾아 런던으로 몰려온 사람들은 최대 무역항이 된 템스 강에서 짐을 나르며 생계를 꾸렸다. 인타이어 버트는 이 짐꾼 노동자들이 가장 애용하던 맥주였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포터라는 별명이 붙었고 나중에는 정식 명칭이 된 것이다.
식민지와 산업혁명으로 잉태된 자본주의는 이런 포터의 인기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자본은 더 큰 수익을 불릴 수 있는 투자처가 필요했다. 이들이 찾은 목표물이 바로 포터였다. 큰 나무 배럴과 수개월의 숙성이 필요한 포터는 자본과 궁합이 맞는 맥주였다.
자본은 양조장을 대규모 포터 공장으로 변모시켰다. 높은 생산 효율과 낮은 비용이 발생하는 규모의 경제가 실현됐고 특정 브랜드 맥주만 취급하는 타이드 펍(tied pub)도 생겼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작은 양조장은 합병되거나 사라지기도 했다. 포터가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시장, 런던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포터는 1820년 들어 전성기를 구가한다. 대영 제국의 간판을 등에 업고 미국, 호주, 남아프리카, 인도 등 전 세계로 수출되었고 아일랜드에는 스타우트라는 자식도 낳았다. 시장에는 마일드 에일, 페일 에일도 존재했지만 19세기 사람들이 맥주 하면 떠올리는 건 검정 색 포터였다.
19세기가 끝나면서 약 200년 간 사랑받던 포터도 황혼을 맞는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들이 좋아하는 포터 대신 앰버색 페일에일을 선호했고 젊은 세대는 숙성된 포터에서 나오는 향을 올드한 것으로 간주했다. 결정타는 페일 라거였다. 깔끔하고 청량한 황금색 라거가 세상에 나타나자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의 추는 한순간에 기울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포터는 영국에서 자취를 감춘다. 런던에서 가장 큰 포터 양조장 중 하나였던 트루먼스는 1930년 생산을 멈췄고 199년 동안 세계 최고의 위상을 자랑했던 위트브레드도 1941년 마지막 양조를 진행했다. 포터는 지방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지만 동네 한 구석에서 늙은이들이 마시던 싸구려 올드 스타일로 여겨질 뿐,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만 같던 포터를 현실 세계로 끌어들인 건 미국 크래프트 씬과 영국 전통 에일 운동을 펼친 캄라(CAMRA)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앵커와 시에라 네바다는 1972년과 1981년 각각 영국 포터를 미국식으로 재해석한 아메리칸 포터를 세상에 내놓는다. 미국 홉 향과 높은 쓴맛 그리고 6% 정도의 알코올을 가진 아메리칸 포터는 크래프트 맥주 운동을 이끌며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양조사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영국 정통 에일을 살리기 위해 조직된 캄라는 70년대 후반부터 포터를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80년대 들어 조금씩 결실을 맺었다. 90년대 후반에는 아메리칸 포터에 자극받은 풀러스가 런던 포터를 출시했고 2000년대 들어 기네스도 사라졌던 포터들을 복원시켰다. 민타임 같은 영국 크래프트 양조장은 개성 가득한 포터를 내세우며 소비자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1997년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에 설립된 파운더스 양조장에서 출시한 파운더스 포터는 아메리칸 포터의 정석이다. 시즈널 맥주로 출발했지만 2001년 리뉴얼을 거쳐 2007년 상시 출시 맥주가 됐고 양조장의 성장을 견인했다. 2010년 중반 한국에 소개되며 포터라는 스타일을 국내 소비자에게 각인시킨 맥주이기도 하다.
파운더스 포터는 어떠한 꾸밈도 없다. 우주와 같은 흑색은 매혹적이며 뭉근한 초콜릿 향은 짙은 쓴맛과 더불어 조화를 이끈다. 매끈한 다크 초콜릿 한 뭉텅이를 마시는 것 같다. 6.5% 알코올은 부드러운 바디감과 함께 좋은 균형감을 이룬다. 아메리칸 포터지만 홉 향은 미미하다. 자극적인 모습보다 뭉툭하고 둥글둥글하니 마시기 편하다. 라벨 속 여인의 시선처럼 아름답고 안락하다.
21세기 포터는 숙성과 블렌딩이 매력이던 19세기 포터와는 다르다. 실제 했지만 실체를 알 수 없기에 지금의 포터는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양조사의 상상력이야말로 원형 너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열쇠다. 포터를 마실 때 4차 산업혁명의 혁신과 1차 산업혁명의 전통의 멋들어진 조화를 기대해 보는 건 어떨까? 과한 바람이라고? 전혀, 즐거운 설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