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 라푼젤, 너의 머리카락을 내리거라. 내가 너의 황금 계단을 오를 수 있도록
상추(라푼젤) 하나가 여러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라푼젤의 엄마가 마녀 밭의 상추를 탐하지 않았더라면 딸은 탑 속에서 고립된 삶을 겪지도, 미혼모의 삶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더 괘씸한 인간은 아빠다. 상추 서리를 들켰다고 어떻게 딸을 마녀에게 보낸단 말인가. 딸의 운명을 알면서 이름을 ‘라푼젤’로 지었다는 것도 경악할 일이다.
자식을 버린 부모와 자유를 빼앗은 마녀, 이상한 어른들 속에 남겨진 라푼젤에게 의지가 된 사람은 왕자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탑으로 찾아온 왕자는 그녀의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임신을 한 라푼젤은 순결을 잃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가시덤불로 떨어진 왕자는 장님이 되어 정처 없이 떠돈다. 이 동화를 보고 있자면 한국 막장 드라마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행히 이 동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다시 라푼젤을 만난 왕자는 그녀의 눈물로 눈을 되찾고 쌍둥이 아들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산다. 하지만 부모가 저지른 잘못을 아이에게 뒤집어씌우는 이야기는 동화치고 어딘가 무섭고 비정하다.
1812년 야콥 그림과 빌헬름 그림은 유럽에 전래되던 이야기를 모아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동화>를 출판한다. 이 책에는 라푼젤,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화를 비롯해 총 200여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폴레옹이 독일을 휩쓸던 시기, 그림형제는 전래 동화 속 게르만 언어와 정신을 전하며 독일 가정에게 민족 정체성을 남기고자 했다.
아이러니하게 그림형제가 가져온 많은 이야기들 중 프랑스에서 건너온 것들도 있었다.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빨간 망토, 장화 신은 고양이는 1697년 프랑스 작가 찰스 페로가 펴낸 ‘옛날이야기’에 있는 작품들이고 라푼젤은 1698년 마드모아젤 드 라 포스의 페르시네트가 원작이었다. 이 프랑스 작가들은 그림형제와 달리 부르주아 출신으로 풍부하고 화려한 프랑스 살롱 문화 속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페르시네트 속 주인공 이름은 라푼젤이 아니라 파슬리였다. 파슬리도 라푼젤처럼 부모에게 떨어지게 되는데 그녀를 데려간 사람은 마녀가 아니라 요정이었다. 이 요정은 파슬리에게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제공했고 좋은 환경 속에서 극진히 키웠다. 왕자와 사랑에 빠져 파슬리가 임신을 했을 때도 요정은 해변의 오두막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보살폈다. 괘씸죄로 왕자의 눈을 멀게 했지만 나중에는 파슬리와 왕자 그리고 아이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정도면 라푼젤을 내팽개친 마녀와는 너무 다른 전개 아닌가?
그림형제는 1857년 7쇄에서 라푼젤의 혼전임신에 관한 내용도 삭제했다. 독일 중산층 부모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같은 플롯을 가지고 있지만 루이 14세 시기 풍요로운 문학적 배경 속에 태어난 페르시네트와 19세기 격동의 독일 역사 속에서 각색된 라푼젤은 다른 동화였다.
구혼자들로부터 딸을 숨기기 위해 탑 속에 가둔다는 내용은 고대 그리스와 아일랜드 기독교 신화 그리고 이태리 동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민담으로만 전해오던 이야기가 실제 역사 속에서 벌어졌다. 15세기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에서 왕국을 꿈꿨던 부르고뉴, 이 작은 공국의 마지막 상속인 마리가 그 주인공이다.
브루고뉴, 브라반트, 헬더란트, 룩셈부르크 공작부인이자 플랑드르, 아르투아, 홀란트, 샤롤레, 쥐트펜 백작부인, 마리 이름 앞에는 긴 작위가 붙는 이유는 아버지 샤를 때문이다. 담대공이라고 불렸던 샤를은 15세기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자였다. 그의 꿈은 브루고뉴 공국을 왕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가장 경계한 사람은 프랑스 황제 루이 11세였다. 그는 브루고뉴가 독립을 하면 프랑스가 어떠한 위협에 맞닥뜨리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샤를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별명처럼 담대하게 프랑스와 맞서 싸웠다. 핵심은 브루고뉴와 나머지 영지 사이에 있던 로렌 공국이었다. 이 지역을 루이 11세에게 뺏기면 부르고뉴는 사실상 반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었다. 샤를은 영국과 동맹을 맺어 정치적으로 프랑스에 압박하고 무력으로 로렌을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루이 11세는 간교하고 영리했다. 그는 프랑스의 힘과 자신의 정치력을 이용해 주변 공국과 백국들이 샤를에게 등을 돌리게 했다.
1477년 1월 날카로운 바람이 부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샤를은 로렌의 수도 낭시를 공격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러나 전장에는 유럽 최강 스위스 용병들이 버티고 있었다. 루이 11세가 데려온 스위스 용병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잔인함과 용맹함을 가진 조직이었다. 결국 샤를은 낭시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강 얼음에서 발견된 그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막 19세가 된 마리는 샤를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브루고뉴를 포함해 아버지가 다스렸던 영지들이 그녀의 휘하에 놓였다. 당연히 이를 가만둘 루이 11세가 아니었다. 겨우 7살이었던 자신의 아들을 마리와 결혼시키고자 했고 군사까지 동원했다. 마리는 단호히 거부했고 결국 겐트에 있는 탑에 갇힌다.
고립되어 있던 그녀를 도운 사람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언이었다. 마리는 원래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이 풍전등화 앞에 놓이자 심복을 통해 막시밀리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청혼의 징표로 머리카락을 잘라 보냈다. 막시밀리언은 망설임 없이 군대를 동원해 그녀를 구했고 1477년 9월 이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지역을 차지하며 향후 수백 년간 통치를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막시밀리언은 아름답고 지적인 마리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너무 완벽했던 커플을 질시했던 것일까. 1482년 마리는 낙마사고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나이 겨우 25살이었다. 게다가 배 속에는 아이까지 가진 상태였다. 막시밀리언이 받았을 충격과 슬픔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사람들은 마리와 막시밀리언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신성로마제국 역사 속 그녀는 아름답고 따뜻한 왕후로, 때로는 성모 마리아로 묘사되었다. 막시밀리언과 마리가 함께 있는 모습 또한 수많은 그림의 주제로 다뤄졌다.
무엇보다 탑 속에 갇힌 마리를 구출한 막시밀리언 왕자의 활약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단골 메뉴였을 것이다. 이 스토리는 동화 그 자체 아닌가. 프랑스 혈통이지만 신성로마제국 사람이 된 마리를 두 나라의 호사가들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파슬리였던 마리가 독일에서 라푼젤이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마리가 잠든 곳은 프랑스도 독일도 아닌 고향 벨기에였다. 벨기에 브뤼허 성모 교회에 있는 그녀의 무덤 옆에는 아버지 샤를도 함께 누워 있다. 마리와 막시밀리언 사이에서 태어난 필리프 1세의 아들이자 가장 위대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프랑스 낭시 성당에 있던 외증조부의 시신을 외할머니 옆에 안치시켰다.
마리의 영혼을 품은 벨기에는 맥주를 통해 그녀를 부활시켰다. 플랜더스 비히테에 위치한 베르헤게 양조장은 두체스 드 부르고뉴(Duchess de Bourgogne), 즉 부르고뉴 공작이라는 맥주를 만들어 그녀에게 헌정했다. 1875년 시작된 이 작은 양조장이 한국에서 유명세를 타게 된 건, 전적으로 이 맥주 덕분이다.
두체스 드 부르고뉴는 한국에서 와인 맥주로 더 유명하다. 붉은 기가 도는 마호가니 색, 뚜렷한 산미, 녹진한 체리와 붉은 베리 향은 이 맥주를 처음 마시는 사람에게 와인을 떠올리게 한다. 두체스 드 부르고뉴가 이런 특징을 갖는 건, 이 맥주가 플랜더스 레드 에일이기 때문이다.
플랜더스 레드 에일은 혼합 발효를 통해 양조되는 벨기에 전통 맥주다. 혼합 발효란 상면발효로 만든 모주를 커다란 오크통, 즉 푸더에 넣고 자연발효를 추가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젖산균과 야생효모가 오랜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관여하기 때문에 시큼한 신맛과 신선한 과일 향이 충만하다.
두체스 드 부르고뉴의 체리와 자두 향은 야생 효모의 몫이며 홍초 같은 산미는 젖산균이 담당한다. 섬세한 단맛은 신맛과 균형감을 이루는 열쇠다. 일반적인 플랜더스 레드 에일처럼 이 맥주도 18개월 숙성 맥주와 8개월 숙성 맥주를 혼합해 음용성과 일관성을 높인다.
맛도 맛이지만 이 맥주의 백미는 라벨에 있는 마리의 모습이다. 이 초상화는 막달렌의 전설의 마스터(Master of the Legend of the Magdalen)로 알려진 네덜란드 화가의 작품이다. 그림 속 마리는 아름답고 젊다. 그녀의 손에 있는 새는 매다. 매는 사냥을 즐겨하던 마리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이 그림을 보면 격동의 역사 속에서 기구한 삶을 살다 간 마리가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진다. 비히테 양조장이 단순하지 않았던 그녀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깊고 다채로운 향을 지닌 플랜더스 레드 에일을 선택한 것은 천재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맥주는 우리와 상관없을 것 같은 중세의 한 여인을 21세기 대한민국에 소환했다. 라벨 속 마리에서 라푼젤이나 신성로마제국을 떠올리는 것처럼 우리 또한 맥주를 통해 유럽인들의 마음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그게 꼭 조선 사람일 필요는 없다. 유관순이나 안중근, 혹은 BTS면 어떠하리. 우리의 얼과 혼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