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한샘 Apr 23. 2023

축구의 동반자, 그 이름은 맥주

맥주와 축구의 끈끈한 인연에 대하여

“남자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순간은 친구들과 축구를 볼 때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순간들은 사라져갑니다...우리는 레알 마드리드와 AC밀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열리는 저녁에 시와 음악이 있는 가짜 클래식 콘서트를 기획했습니다.”


하이네켄이 기획한 거대한 사기극

관객이 꽉 찬 클래식 공연장. 무대에는 바이올린과 챌로가 아름다운 선율을 읊조리고 있었고 대형 스크린에는 섬세한 펜이 리듬에 맞춰 운율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아한 분위기와 달리 객석 대부분 사람들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역력했다. 특히 남자들의 표정은 착잡함 그 자체였다.


이들은 모두 이태리 축구팀 AC밀란 팬들로 레알과 밀란의 경기를 포기한 채, 누군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공연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 친구 손에 이끌려 앉아있는 남자들은 멍한 눈으로 무대를 응시했고 교수님의 과제를 하기 위해 참가한 남학생들은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저널리스트들로 보이는 사내들은 들키지 않을 정도로 연신 하품을 했다.


15분 정도 흘렀을까. 바이올린과 챌로 위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음악에 맞춰 써 내려가던 시 또한 운율을 벗어나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잠시 후, 스크린에 보이던 펜이 마치 관객들의 심경을 헤아리듯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상사에게 싫다고 말하기 어렵죠? 여자 친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어요. 그렇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이 경기를 포기할 생각을 했어요?’


동시에 유럽 챔피언스리그 공식 테마곡이 울려 퍼졌고 그제야 사람들은 뭔가에 당했다는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스크린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AC밀란 선수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옆에는 빨간색 별을 품은 초록색 맥주가 웃고 있었다.

 

이 거대하고 유쾌한 사기극(?)을 기획한 곳은 네덜란드 맥주 하이네켄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축구 이벤트인 챔피언스리그에 맞춰 깜짝 몰래카메라를 준비한 것이었다. 챔피언스리그는 유럽 축구 연맹(UEFA)에 소속된 최고의 팀들이 참가하는 대회로 세계적인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이 영상이 스카이 스포츠에 소개되자 수 천만 명의 사람들이 응원과 화답을 보냈다.
 

민중의 음료 맥주, 노동자의 스포츠 축구

하이네켄과 챔피언스리그

2005년부터 챔피언스리그와 독점적 파트너십을 맺은 하이네켄은 다양한 광고와 프로모션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여왔다. 2019년 하이네켄이 유로 대회와 UEFA 챔피언스리그, 슈퍼컵 등 유럽 축구 연맹과 맺은 계약은 3년 간 무려 1억 2천만 달러, 원화로 1586억 원이 훌쩍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챔피언스리그 시즌인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하이네켄은 스타디움 내 모든 광고, TV 중계권 및 광고, 티켓 이벤트를 통해 전 세계 축구팬과 소통하고 있다.
 

하이네켄이 펼치는 티켓 이벤트는 다채롭고 기발하다. 친구를 배신하고 축구장에 온 남자를 주인공으로 찍은 딜레마 편, 축구를 보기 위해 여자 친구에게 준 스파 티켓이 사실 챔피언스리그 결승 티켓이었다는 클리셰 편 등, 몰래카메라를 통해 깜짝 티켓을 선물하는 이벤트는 오랫동안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친근함과 웃음을 심어줬다.
 

축구 팬들이 챔피언스리그 별과 하이네켄의 별을 동일 시 하는 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전 세계 수억 명의 축구팬들은 챔피언스리그 테마곡이 흘러나오면 자연스럽게 하이네켄을 떠올린다. 맥주가 스포츠와 연결되며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이런 정서적 일체감이다. 

   

하이네켄과 유럽 축구 연맹의 관계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인 피파(FIFA) 월드컵은 어떨까? UN보다 가입국이 많다는 국제축구연맹, 피파의 맥주 파트너는 안호이져 부쉬(Anheuser Busch)다. 두 공룡의 인연은 3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작년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계약 규모는 7천8백만 달러, 한화로 약 1031억이었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의 경우에는 무려 1억 1400만 달러, 15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안호이저 부쉬는 사실 스포츠 마케팅을 개척한 브랜드다. 1953년 미국 프로야구 세인트 카디널스와 맺은 후원 계약은 최초의 맥주 스폰서십으로 알려졌다. 20세기 안호이저 부쉬가 꿰뚫은 이 통찰은 스포츠와 맥주 산업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지역 스포츠 구단 후원이 상호 간 긍정적인 시너지를 일으킨다는 것이 증명되자 그 영역은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PL)와 미국 풋볼 리그(NFL)까지 확대됐다. 맥주 브랜드뿐만 아니라 스포츠 구단과 협회도 서로 큰 이익을 봤다는 의미였다. 도대체 맥주는 왜 스포츠와 궁합이 잘 맞는 것일까?
 

우선 맥주가 타 주류보다 낮은 알코올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스포츠를 관람하며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시는 것은 성가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성보다 감정이 지배하는 경기장에 과도한 알코올은 부적절하다. 스포츠가 더 이상 마초들의 놀이터도 아니지 않는가.
 

맥주가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술인 것도 중요하다. 특히 라거의 청량감은 물을 대신해 본능을 충족시키고 긴장감을 지속시킬 수 있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야구 경기장에 비어맨이 있는 건, 약 4시간 남짓한 관람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햄버거나 바비큐 매출을 높이기 위한 파트너로도 맥주 외에 다른 궁합을 상상하기 어렵다.
 

맥주가 인류와 함께 해온 보편적이고 문화적인 감성도 빼놓을 수 없다. 와인이 귀족의 술이었다면 맥주는 민중의 음료였다. 노동자 스포츠로 시작한 축구는 정서적으로 맥주와 같은 피가 흐른다. 전쟁터 같은 피치 위에서 계급장 떼고 맞붙는 축구와 통하는 술은 맥주 밖에 없다. 펍 문화도 궤를 같이 한다. 퍼블릭 하우스를 의미하는 펍은 노동자에게 유일한 놀이의 공간이었고 커뮤니티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삶을 이야기했고 정치를 논했다. 그리고 축구를 보면서 일체감을 느끼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전 세계 리버풀 진성 팬들을 위한 선물
 

역사 상 맥주와 단일 스포츠 구단이 이룬 가장 끈끈하고 성공적인 파트너십은 영국 리버풀 FC와 덴마크 맥주 칼스버그에서 찾을 수 있다. 1992년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30년 이상 지속되는 이들의 관계는 충성심을 넘어 아이콘이 됐다.
 

리버풀 FC의 빨간색 유니폼에 있는 칼스버그 로고는 승리의 부적이었다. 1995년 리그컵 우승을 시작으로 2001년에는 UEFA 우승컵을,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불리는 2005년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빅이어를 차지하며 최고의 순간을 함께 했다. 2010년 비록 유니폼 스폰서는 스탠더드 차타드 은행에게 양보했지만 둘은 지금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리버풀 FC와 파트너십을 기념하기 위해 칼스버그가 창조한 맥주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2017년 25주년 기념 맥주로 출시한 필스너는 각별했다. 칼스버그는 이 이벤트를 위해 특별한 홉을 준비했다. 연구원들은 리버풀 경기가 나오는 스크린을 실내 농장에 마련했고 홉이 자라는 동안 꾸준히 영상과 소리를 노출시켰다. 홉에 리버풀 FC의 영혼을 이식한 것이었다. 레드 홉으로 명명된 이 홉은 드라이 호핑 방식으로 맥주에 첨가됐다. 황금색 레드 홉 필스너는 리버풀 FC 팬과 같은 붉은색 심장을 품고 있는 맥주였다.
 

26주년 맥주는 더 흥미롭다. 아예 붉은색 보리를 이용한 필스너를 세상에 내놓았다. 칼스버그 연구소는 여러 품종을 개량한 끝에 붉은색 보리 재배에 성공했고 이를 리버풀 기념 맥주에 사용했다. 이 맥주의 색은 정말 붉다. 붉은 색 필스너를 마시는 리버풀 팬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2022년, 파트너십 30주년 기념 맥주는 리버풀 진성 팬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제이미 캐러거를 비롯한 6명의 레전드의 이름과 유니폼을 담은 맥주를 전 세계에 출시했다. 맥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였고 맥주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한 표현이었다.
 

초록색 잔디 위 합법적인 전쟁터


첫걸음에 불과하지만 국내에도 맥주와 축구가 맺은 의미 있는 파트너십이 있다. 2016년 칭따오는 K리그 수원 삼성 FC와 공식 스폰서십을 체결했다. 2020년까지 4년 동안 칭따오는 대형 전광판과 3면 LED 보드, 좌석 현수막 등을 통한 브랜드 광고뿐만 아니라 ‘칭따오 불금나이트’, ‘칭따오 피크닉’ 등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이벤트를 진행했다. 충성심이 확실한 수원 팬들은 ‘제수칭’(제발 수원 팬이면 칭따오)라는 캠페인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수원은 지금 강등권이다. ^^

코로나로 잠시 멈췄던 시기를 지나 2023년 다시 수원 삼성과 파트너십을 맺은 칭따오는 축구와 맥주는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며 팬들과의 강한 유대감을 통해 브랜드 성장을 추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신은 혼자 걷고 있지 않다’는 리버풀 FC의 모토는 스포츠와 맥주 세계에도 적용되는 진리였다.
 

독일 바이에른 뮌헨 구단의 홈경기장인 알리안츠 아레나는 축구와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놀이동산과 같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알리안츠 아레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디움 중 하나다. 이곳 3층에는 맥주의 도시, 뮌헨답게 특별한 공간이 있다. ‘파울라너 팬트레프‘다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마신 파울라너 라거

‘팬트레프’(Fantreff)는 팬 미팅 포인트(Fan Meeting point)를 의미한다. 바이에른 뮌헨 공식 후원 맥주인 파울라너는 이곳을 비어가든으로 운영하고 있다. 긴 테이블과 의자 뒤에 걸린 TV에는 우승 후 파울라너를 마시는 선수들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방문객들은 자유롭게 앉아 파울라너 맥주와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경기가 없는 평일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곤 한다.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를 보며 파울라너 맥주를 마시는 경험은 독특하다. 마치 파울라너가 뮌헨을 대표하는 맥주라는 착각도 일으킨다.
 

우리가 축구라는 공놀이에 열광하는 것은 초록색 잔디 위가 합법적인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피 대신 땀을 튀기며 치열한 경기를 한 선수들은 전투가 끝나면 악수를 하고 결과를 인정한다. 관중석에서 그들과 아드레날린을 뿜었던 우리들도 휘슬 소리와 함께 다시 문명으로 돌아온다. 맥주는 가식이 사라지고 페르소나를 벗어버린 90분 동안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술이다. 물론 그 안에는 절제와 이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야만과 문명의 경계는 생각보다 가깝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