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술 문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108조. 맥주를 파는 아낙네가 값을 곡물로 받지 않고 은을 달라고 요구한다거나, 좋지 않은 재료를 써서 맥주의 품질이 나빠진다면, 여인을 붙들어 처벌을 내린다. 물속에 빠뜨려 죽일 수도 있다.
109조. 만약 반역자들이 술집에 모였다면, 그 반역자들을 잡지 못했더라도 술집 주인은 사형에 처한다.
110조. 여사제가 술집을 열거나 술을 마시러 들어간다면, 화형에 처하노라.
술집은 언제 시작됐을까? 인류 역사 중 술집이 언급된 최초의 문서는 약 4000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다. 총 282개 법문 중 108, 109, 110조에 술집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108조는 술집에서 곡물을 암암리에 대체하던 은을 국가가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9조는 기원전에도 술집이 정보 교환의 장이었고 110조는 매춘이 성행하던 술집에 여사제의 출입을 금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술집이 단순히 술을 먹던 곳이 아니라는 건, 수천 년 전 현무암에 각인된 법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로마 이전까지 술집은 흔한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돈을 내고 술을 사먹는 행위를 천박하게 생각했다. 상류층은 노예들이 재배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거나 진상품을 마시곤 했다. 방문한 손님들에 대한 무상 접대는 당연한 예의였다. 평민들도 돈을 받고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술은 음료에 가까웠다. 집에서 만든 과실주나 곡주를 물에 섞어 일상적으로 마셨다. 부족하면 이웃과 물물교환을 하거나 공짜로 얻곤 했다.
본격적인 술집의 등장은 화폐 경제와 관련이 깊다. 로마가 유럽을 관통하는 도로를 건설하자 장거리 무역이 활성화되며 화폐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도로와 항구에는 돈을 받고 숙박과 음식 그리고 술을 제공하는 장소가 들어섰다. 술집은 대중 복합 공간으로 변해갔다. 도박, 공연, 매춘까지 성행했다. 귀족들은 여전히 술집을 경멸했다. 하층민과 상인들이 모이는 술집은 고매한 이들에게 불결하고 시끄러운 곳이었다.
로마가 멸망한 후 술집의 역할을 물려받은 곳은 수도원이었다. 로마 문명을 이어받지 못한 채 수백 개로 나뉜 중세 유럽은 고립되고 단절됐다. 전쟁과 질병으로 고통 받던 초기 중세인들에게 수도원은 중요한 커뮤니티 공간이었다. 수도사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신의 말씀을 전달하고 실행하는 임무 이외에도 법원, 병원, 교육 같은 일을 도맡았다. 양조도 중요한 일과였다. 수도원이 방문객에게 음식과 음료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은 당연했다. 와인과 맥주도 그중 일부였다. 수도사들은 계획대로 하루 일과를 보내며 규칙적으로 양조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글로 전수되는 레시피는 평민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중요한 지식이었다. 수도원 맥주는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관혼상제를 함께 했다. 과도한 음주는 멸시의 대상이었지만 음주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수도사들에게도 과음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수도원은 자연스럽게 맥주 양조장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거대한 양조장이 있던 스웨덴 장크트 갈렌 수도원과 자급자족을 위해 맥주를 만드는 트라피스트 수도원, 천년의 양조 역사를 품고 있는 벨텐부르크 수도원은 맥주와 수도원이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중세 시대 수도원은 술집의 역할을 대신하던 공간이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며 수도원과 술은 서서히 내외하는 관계로 바뀌게 된다. 교회가 세속을 떠나 신의 말씀을 전하는 신성한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수도원 내의 음주와 관계된 모든 행위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 경제 성장도 술집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북유럽 한자동맹을 중심으로 러시아, 스칸다나비아, 북독일, 영국까지 대륙 간 무역이 성행했고 포르투칼에서 시작된 대항해시대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무역으로 상업 활동을 확장시켰다.
사람과 재화가 흐르자 머물고 먹을 곳이 필요했다. 타베르나, 가스트하우스, 인(inn), 에일 하우스(ale house) 등 이름과 규모는 달랐지만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공간이 도시와 항구를 중심으로 등장했다. 숙박, 음식, 술이 판매됐고 연회, 공연, 매춘, 도박도 벌어졌다.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정보의 공유였다. 대부분 문맹이었던 하층민들은 술집에서 도는 소문이 중요한 정보였다. 무역상들도 전쟁과 규제 같은 민감한 정보를 술집에서 교환했다.
화폐 경제가 확장되며 농촌에도 술집이 생겼다. 이런 풍경은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625년 아드리안 브라우어의 ‘여관에서 술 취한 농부들’는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농부들을 담고 있다. 게임의 결과를 두고 놀라는 사람, 술에 곯아떨어진 남자, 우는 아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든 아낙네의 모습을 정겹게 그리고 있다.
1647년 아드리안 반 오스테드의 ‘여관에 있는 세 명의 농부들’은 흥겨운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맥주와 담배를 즐기는 농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심지어 빨간 모자를 쓴 남자는 당시 흔하지 않던 유리잔에 짙은 황금색 맥주를 마시고 있다. 농촌에도 여관(inn)이 숙박 외에 다양한 역할을 하던 공간이었음을 당시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상류층들은 하층민들이 모이는 술집을 멀리했다. 합스부르크 왕조 페르디난트 2세가 머물렀던 1648년 암브라스 성의 그림 속에는 거대한 양조장(그림 속에 D로 표기)이 보인다. 술은 직접 양조해 마시거나 수도원에서 구입해 집에서 즐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은 술집에 대한 통제권은 놓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에서 영주와 교회는 맥주의 재료였던 그루트 판매권으로 양조와 술집 허가에 관여했고 왕권이 강했던 영국에서는 왕이 직접 양조 허가를 관할하며 이득을 취했다. 때로는 영주와 수도원에서 양조한 술을 강매하기도 했다.
지박령 같던 상류층들을 밖으로 끌어낸 건,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세계 무역의 중심이 된 런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던 인과 에일 하우스는 방문객들의 수요에 따라 여관, 레스토랑, 펍으로 분화됐다.
영국에서 펍은 노동자에게 유일한 여가 공간이었다. 귀족과 자본가들에게는 오페라, 와인, 연회와 같은 유흥 거리가 있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일과 후 스트레스를 풀 곳이 마땅치 않았다. 펍은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을 한 사람들을 위한 안식처였다. 그곳에 가면 친구와 동료, 이웃이 있었다. 맥주와 음식을 먹으며 일상을 공유했고 사회의 부조리를 논의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정치적 의견을 도모하기도 했다. 단순히 술을 마시는 곳이 아니라 중요한 커뮤니티 역할을 했기에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 줄여서 펍(pub)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17세기 초 엘리자베스 시대에 시작된 펍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절정을 맞는다. 이때부터 상류층들도 펍을 찾았다. 내부에는 계급별로 들어갈 수 있는 방이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귀족과 자본가는 살롱(salon)과 팔러(palour)라는 방에서 술을 즐겼다. 시간이 지나며 상류층들은 고급 살롱과 클럽처럼 전용 공간을 마련했다. 맥주도 구분했다. 노동자들이 다크 에일 포터(porter)를 좋아했다면 상류층들은 알코올이 높고 진한 로버스트 포터(robust porter)나 색이 밝은 페일 에일을 선호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으로 봉건제가 철폐되자 상류 계급도 밖에서 술과 음식을 즐겼다. 맥주에 집중된 영국과 달리 다양한 술을 파는 곳이 많았다. 비스트로, 캬바레, 바 외에 카페에서도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초기 카페는 상류층을 대상으로 커피를 팔던 곳이었으나 점차 대중화되며 맥주와 와인도 판매했다. 에두와르 마네의 1878년 작 ‘카페에서’는 상류 계급으로 보이는 남녀가 황금색 맥주를 즐기는 모습을, 1882년 유작 ‘폴리베르제르의 바’에서는 유명한 영국 맥주 ‘바스’뿐만 아니라 샴페인, 와인, 리큐르 등을 판매하는 고급 바의 풍경을 볼 수 있다.
과거 호프집으로 불리던 대한민국의 맥주집은 최근 펍이나 탭룸(tap room)으로 변화되고 있다. 호프집은 대중 맥주를 값싼 안주와 먹던 곳이었다면 펍과 탭룸은 다양한 맥주와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맥주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가와 최적의 서빙을 위한 장비가 존재한다. 적절한 맥주의 탄산과 온도를 위한 냉장고와 전용 글래스도 구비하고 있다. 음식도 맥주에 맞춰 구성된다. 겉으로 봤을 때는 외국 펍과 다를 바 없지만 한국 펍은 지향점이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펍은 어떤 의미로 변하고 있을까?
영국 펍이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공간이라면 한국 펍은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지와 같다. 펍을 간다는 건 익숙지 않음을 경험하러 오는 것이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도 있고 책이나 영화를 볼 수 있다.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멍을 때려도 된다. 좋은 맥주와 음식은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최소한의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최근 펍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맥주를 마시는 것을 벗어나 문화와 자유를 즐기러 온다. 펍은 바쁜 일상에 쉼표를 찍는 공간이 되고 있다. 좋은 술 문화는 이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