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 감독만의 분명한 에너지
'선거를 보름 앞둔 어느 날, 그의 딸이 실종된다'라는 문장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선거'와 '실종'이다. 종찬(김주혁 분)과 그의 아내 연홍(손예진 분)의 딸이 실종될 것이며 이는 종찬의 출마와 관계있을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하지만 포스터에서 종찬보다 연홍을 내세우는 것을 보니 극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연홍이 될 것 같다. 제목을 통해서는 뭔가 숨겨진 것을 밝히며 극을 마무리하겠다는 스릴러의 전형적인 각오도 엿보인다.
하나, <미쓰 홍당무>와 <친절한 금자씨> 그리고 <비밀은 없다>
이경미 감독은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으로 제3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후 <친절한 금자씨>의 스크립터를 거쳐 <미쓰 홍당무>로 첫 장편 데뷔를 했다. 박찬욱 감독은 그녀가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한 연도에 심사위원으로 있었으며, <친절한 금자씨>는 그의 작품이고, <미쓰 홍당무>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왜 '박찬욱 키드'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관객들이 <비밀은 없다>에서 박찬욱스러움을 발견한다. 내 지인 중 한 명은 '<박쥐> 조금, <친절한 금자씨> 조금, <아가씨> 조금 넣었더니 <비밀은 없다>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평을 내렸다. 전혀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와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확실히 다르다.
오히려 연홍은 이경미 감독의 전작 <미쓰 홍당무>의 미숙(공효진 분)과 닮아있다. 센 척, 강한 척을 엄청 하는데 사실은 상당히 멍청한 캐릭터다. 연홍의 딸 민진은 '엄마는 멍청하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라는 말을 한다. 실제로 연홍은 종찬의 아내로서, 민진의 엄마로서 완벽해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나 한 번도 온전히 아내이자 엄마여 본적은 없다. 딸이 실종된 마당에 남편의 선거운동은 함께 해야 하는 여자다. 둘 다 완벽히 해내려고 발 벗고 돌아다니긴 하는데 성과는 없다. 극의 마지막에선 토해내듯 '멍청하다'라는 말을 뱉어내기도 한다.
이처럼, 연홍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자신의 허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캐릭터다. 그녀가 위태롭다는 사실은 그녀 빼고 모두가 알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다. 이는 이경미 감독만이 그려낼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나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를 좋아한다. 얼마 전에 적었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민정(이유영 분)'이라는 여성 캐릭터 역시 좋아한다. 홍상수 감독이 만들어내는 인물들은 오로지 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캐릭터라고 느껴진다. 연홍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미숙도 떠올랐다. 이경미 감독만의 인물이고 색깔이다.
둘, <진이와 옥이>와 <불량소녀> 그리고 <행복이 가득한 집>
<비밀은 없다>는 개봉 후 빠른 속도로 2차 시장에 들어섰다. 이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을 담아내지 못한 포장지에 있다. 앞서 잠깐 이야기한 것처럼, 일단 <비밀은 없다>는 작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중 가장 안타까운 카피를 내세웠다. 이에 어울리지 않는 포스터와 제목도 한 몫했다. 사실 흥행 참패의 원인을 여기에만 두는 것은 너무 편협적인 시각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작품이 지니고 있는 차별화된 장점을 단점이라 판단한 것은 분명 큰 패착이라고 생각한다. 낯선 스릴러를 친숙하게 포장해보려 했던 시도가 역효과를 냈다.
<비밀은 없다>의 첫 이름은 민진이와 미옥이의 밴드 이름을 딴 <진이와 옥이>였다고 한다. 이후 박찬욱 감독이 <불량소녀>를 제안했고, 역설적 의도가 가득 담긴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이름도 거쳤다. 이 작품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제목은 뭐였을까. 사실 비판에는 대안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나한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그래서 이 단락이 막연한 비난으로 읽히더라도 할 말은 없다.
가끔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고,
한 번쯤은 다시 봐도 좋을 것이다.
빅맥세트를 라지 사이즈로 먹으며 늘 제로콜라를 고수하는 지인이 있다. 그의 플라시보적 고집을 비웃었지만 나 역시 몸에 살이 붙었다 싶으면 마트에서 카스라이트만 집는다. 제로콜라와 카스라이트가 코카콜라와 카스보다 얼마나 칼로리가 적은 지에 대해 깊게 고민하거나 의심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되는 마음의 안정이 아주 크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사람은 꽤 많은 부분에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비밀은 없다>를 박찬욱 감독을 흉내 낸 작품이라고 바라보면 그에 대한 수많은 근거를 찾아낼 수 있다. 주장을 이미 사실이라 단정하고 근거를 가져다 붙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 과정을 거치긴 하겠지만, 작품 속의 많은 장치가 그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는 재평가받아봄직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내내 팽팽한 연홍의 감정과 완전히 새로운 모성 복수극의 설정, 그리고 뿌려진 복선을 꼼꼼하게 거둬들이는 성실함까지. 감독의 에너지가 강하게 표출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