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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Mar 31. 2017

족구왕과 자문자답  

그때에 남겨뒀던 질문과 다시 또 남겨 둘 질문


교복을 입던 시절, 사람들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엊그제 같다’라는 말을 싫어했었다. 분명 저 어구는 누군가 선물을 건네기라도 하면 양손을 휘저으며 ‘아유, 뭘 이런 걸 다~’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앞뒤 다른 겸양 표현의 일종이라 여겼다. 도대체 왜 이렇게 시간은 느리게 가는 건지, 날마다 내 시간만 느린 건가, 수십 번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랬던 내가 어느덧 하루에 열댓 번 저 어구를 찾는다. 해야 할 일이 없는 날에 꼬박꼬박 만들던 술 약속을 이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나는, '책임'이라는 것을 무겁게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 꾸준히 여전히 뜨거울 수 있을까.

자취방에서 맞이하는 주말이면, 하루의 오전은 암묵적으로 수면에 양보했었다. 흔히 말하는 학점, 스펙, 자격증, 어학점수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확신했었고, 대학 문을 나서기 전까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 하나만 찾으면 된다는 목표도 있었다. 

어느새 그 대학 문을 나섰고, 이제 학교에 갈 일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에 큰 변화가 생겼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한 남다른 목표라도 있냐고 물으면, 그 역시 아니다. 여전히 좋아하는 것의 언저리를 머물며 그 작은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매일 밤 알람을 맞춘다. 여행 계획보단 업무 스케줄을 먼저 생각하고, 귀가 길에 오늘은 어떤 영화를 보고 잘까 대신 오늘은 몇 시간이나 잘 수 있나를 계산한다. 딱히 우울하거나 답답하거나 그렇진 않다. 그냥 이른 출근 시간과 예상보다 조금 적은 월급 탓에 썩 유쾌하진 않고, 이러다 보면 내가 진짜 가고자 했던 길 위에 서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살짝은 조급하다. 하지만 불안과 의심보단 당장 눈앞에 놓인 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에 적당히 속상하기도 하다. 써놓고 보니 이게 우울하고 답답한 것과 뭐가 다른가 싶다. 자기 위안인가. 현실 부정인가.


<족구왕>을 뒤늦게, 처음 봤을 때는 대학 4학년 1학기를 다니던 시점이었다. 그때의 나는 흔히 말하는 스펙들, 어학점수와 학점, 대외활동과 인턴십 등으로 휴학을 고민하고 있었고, 휴학 후 어떤 것부터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었다. 어제, 족구왕을 다시 보고 그때의 일기를 찾아봤다. 감성이 줄줄 흘러내리는 문장이 쓰여있었다. '꾸준히 뜨거울 수 있을까.'


아마 나는 눈앞에 놓여있는 '해야 하는 일'의 당위성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저 많은 것들이 충족이 되어야 하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왜 세상 사람들이 하고 싶은 건 각자 다른데, 모두 도서관에 모여 앉아 토익시험을 치고 중국어를 배우며,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 어학연수를 다녀와야 하는 걸까. <족구왕>에 등장하는 만섭(안재홍 분)의 기숙사 선배(박호산 분)처럼, 그때의 내 주변에도 '그게 싫으면 그냥 공무원 시험을 봐!'라는 말을 뱉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슨 동문서답 이냔 말이다.

결국 내 의문을 해결할 답을 찾지 못했고, 그냥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적당히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지금이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 내게 이 언저리라는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엔 아직 열정이 있고, 꿈도 있다. 그래서 가능성도 있다.




둘, <족구왕>에 대한 여전한 단상

<족구왕>이 <족구왕>인 것은 참 다행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학생들이 모여 '족구'를 하겠다고 하는 게 얼마나 고리타분한 발상인가. 내게도 족구라 함은 아빠뻘의 어르신들이 회사 야유회를 가서나 하실 법한 스포츠다. 게다가 만섭을 비롯한 족구에 열광하는 친구들은 모두 하나같이 루저로 등장한다. 족구가 가진 이미지를 십분 활용했다. 작년 여름에 개봉한 <범죄의 여왕>에서 단역으로도 출연할 만큼 끼가 많은 우문기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지금, 다시 보아도 넘치는 재치로 서툰 부분을 잘 가려낸다.


<족구왕>은 친근하면서도 낯선 이야기다.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는 만섭의 기숙사 선배나 원푸드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창호(강봉성 분), 그리고 복학 후 낯선 학교로 돌아오는 만섭까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복학 후, 족구장이 사라진 것을 보고 만섭은 총장과의 대화에 참석한다. 그리고 족구장을 다시 만들어달라고 한다. 전역한 자신을 보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는 선배의 말에 자기는 연애가 하고 싶다고 답한다. 너한테 족구가 뭐냐는 질문에 대한 만섭의 대답은 '재밌잖아요'이다.

분명 친근한 이야기다.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과 배경이다. 그렇지만 많이 낯설다. 지금 내 주변엔, 없어진 족구장을 그리워할 사람도, 선배의 미래에 대한 조언 앞에 연애가 하고 싶다는 대답을 내어놓을 사람도 없다. 만섭은 우리와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닮고자 하는 모습과 닮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족구왕을 처음 봤을 때의 나와 다시 봤을 때의 나 사이에는 꽤 긴 시간이 존재한다. 드라마틱한 삶의 변화는 없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조금씩 변해왔다. 그래서 지금과 그때는 많이 다르다. 그때의 나는 지금쯤이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완벽한 밑천을 마련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여러 번 말하지만 여전히 언저리에 있다. 그래도 그때의 내가 남긴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꾸준히, 그리고 여전히 뜨거울 수 있다. 지치지 않게 조금씩 오다 보면 쉽게 식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잔열들이 모여 점차 더 뜨거워지게 한다. 꽤 많이 걸어왔으니 돌아가진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한다. 또, 얼마 후에 다시 <족구왕>을 찾을 나를 위해 오늘도 다이어리에 감성이 흘러넘치는 질문을 하나 남겨둬야겠다. 그리고 또 일주일을 잘 걸어온 나를 위해 맥주도 한 캔만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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