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경찰>과 <박열> 사이, 여성이 아닌 사람에 대한 문제
영화를 보고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는 일이 좋다.
그렇지만 가끔, 영화를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이, 글을 쓰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것이 무척이나 사치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도 그 사치의 기준이 잔에 맥주를 따르는 일에 미치진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요새 무척이나 쓰고 싶지 않은 글 속에 파묻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모든 글은 나를 나타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글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기소개서.
그래서 삶이 한껏 불편한데, 괜스레 불편한 영화를 한 편 봤다. 덕분에 오늘은 그냥 쓰고 싶은 글을 쓰기로 했다.
경찰이 되고 싶다는 남동생이 <청년경찰>을 보러 가자고 했었다. 이런저런 사정에 함께 극장에 가지 못했고, 뒤늦게 혼자 작품을 찾아봤다. 동생은 <청년겅찰>이 자신이 하고 있는 공부에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기자를 준비하는 친구가 요새 <아르곤>이라는 드라마를 열심히 챙겨보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동생이 <청년경찰>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치스러움에 허덕이는 동안 <청년경찰>은 여러 매체에 회자됐다. 나는 상대적으로 젠더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 아니다. 이런 평가에 '상대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건 내 주변에 그러한 사람이 많아서 일수도 있고, 이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아직도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무튼 버디무비를 표방하는 한국 영화들에 흔히 따라붙는 '도구로서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 탐탁해 하진 않지만, '작품을 보는 게 불편해 당장이라도 극장을 나가고 싶었다'는 평을 달 정도는 아니다. 그런 내가 <청년경찰>에 그런 평을 하고자 한다.
기준(박서준 분)과 희열(강하늘 분)은 경찰대학 동기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여자 친구를 찾고자 클럽으로 향한다. 짝을 찾는 데 실패한 둘은 피시방에 가서 게임이나 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때, 운명적이게도 마음에 드는 얼굴 작고 키 큰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 여자의 뒤를 밟으면서 번호를 따올 사람을 정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한다. 그 사이 여자는 납치된다.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기준과 희열은 여자의 뒤를 밟았다. 하지만 그 둘이 주인공임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가위바위보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 웃는다. 아마 바보같이 티격태격대는 주인공들의 모습으로 하여금 버디무비로서의 장치를 넣고 싶었던 것 같다. '가위바위보를 안 했다면 여자를 구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내가 제시하는 이 연출의 문제는 카메라는 여자의 뒤를 밟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게 뭐가 문제냐고 되묻는다면, 앞뒤 전후 사정없이 딱 그 씬만 본다면 기준과 희열이 곧 여자를 납치할 것 같기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장면을 웃으면서 본다. '잘생긴 남자 둘이서 여자 번호 따려고 뒤를 좀 밟는 건데, 오싹할게 뭐가 있어?'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의 뒤를 밟는 것, 박서준과 강하늘이라서 오싹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굳이 더 할 말은 없다.
알고 보니 그 여자가 '귀파방'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설정과 또 한 번 불필요한 시선으로 비춰지는 여성의 육체.
납치당한 여자와 함께 사는 어린 학생들에게 "(납치범들이) 몽둥이로 언니를 때린 다음 납치했어."라는 지극히 솔직한 희열의 진술에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는 관객들.
난자 적출을 목적으로 한 주사 탓에 엉망이 된 여성의 복부, 그리고 이와 교차되는 그들을 구하겠다는 명분 하에 체력을 단련하고 소고기를 구워 먹는 두 남성 주인공의 근육질 몸매.
화룡점정은 크레딧이 끝난 후 마지막 영상이다. 피해 여성이 감사를 표하고자(?) 학교로 두 주인공을 찾아온다. 그런 여성을 한 번이라도 더 안아보겠다고 또 티격태격하는 기준과 희열의 모습에, 극장을 나서는 바로 직전까지 헛웃음이 일었다.
젠더 감수성의 연하고 짙음을 논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년경찰>은 개봉 이래로 꾸준히 박스오피스의 자리를 지키며 560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저 중엔 나처럼 허망함을 안고 극장을 나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유쾌한 오락영화에 기분을 전환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감독은 <청년경찰>을 통해 "사회의 안전망을 체크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원하는 '사회의 안전망'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어 진다. 작품 속에서 그토록 강조하던 크리티컬 타임인 7시간 속에서도, 여성의 육체에 혼이 팔려 귀를 내어준 희열의 모습일까. 아니면 피해 여성들이 난자에 장기까지 적출당하는 동안, 두 청년경찰이 보기 좋은 근육질 몸매를 만드는 모습일까.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늘 이준익 감독님을 말한다. 이유를 묻는다면 감독님이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방법을 꼽는다. 작품 속의 모든 캐릭터가 그 자체로 주연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이준익 감독님의 작품에선 늘 생기를 느낀다.
그리고 지난달 초에 <박열>을 봤다. 제목은 '박열'이지만, '후미코'의 잔상이 더 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서사는 박열(이제훈 분)과 후미코(최희서 분)를 성실히 따라간다. 불평등한 남녀관계를 지닌 시대를 표방하고 있지만, 박열과 후미코는 동거하는 부부라기보다는 '동지'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이는 소소한 연출과 도구들이 모여 선사하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후미코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요청을 받은 박열이 "내가 후미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녀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으니 그녀의 주체적인 진술에 맡기겠다"는 대답을 건네는 것과 같은.
<박열>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두 사람의 서사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러닝타임 내내 후미코와 박열을 동등하게 그려내려고 노력한 흔적들 말이다.
여전히 많은 작품에서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생기를 느끼기는 힘들다. 특히 그 캐릭터가 여성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어떨 때는, 차라리 이 캐릭터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는 종종 한국 영화가 그려내는 여성의 모습을 찾고자, <아가씨>나 <비밀은 없다>, <죽여주는 여자> 등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분석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주연이 아닌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캐릭터다.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여자이기 전에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품에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등장시키고 싶다면,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들어 줘야 한다. 작품 속 캐릭터가 말을 하고, 밥을 먹고 움직인다고 하여 다 사람은 아니다. 사람은 단순한 생명체가 아닌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