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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Dec 17. 2017

또, 일 년의 끝

'연말스러운' 영화는 무엇일까

자주 가던 카페에 캐롤이 흘러나오고 귀여운 조명이 설치되기 시작하면 또 일 년의 끝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나는 연초보다 연말을 좋아한다. 거창한 계획으로 스스로를 다독여야 하는 연초에 비해, 연말은 그냥 남은 시간을 따듯하게 잘 보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세며, 연초에 세웠던 목표 중 절반 정도를 내년의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예쁘게 잘 쓴 글씨에 만족해했다. 이런 걸 보면 스스로가 어지간히 자기합리화에 익숙한 사람임을 느낀다.


내가 연초에 세우는 계획은, 목표보단 '꿈'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이루면 너무 좋겠지만, 이루지 못할 수도 있는 것. 그리고 그렇다 해도 크게 스스로를 규탄하진 않을 것들. 하지만 개중에는 올해 반드시 해내야만 했던 목표도 몇 가지 있었고, 해낸 것도 있고 해내지 못한 것도 있다. 몇 년을 가져갈 계획일지 모를 '날씬이 되기' 같은 것.


그리고 연말은 무엇보다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한 잔 하는 좋은 핑계가 되어주기도 한다. '송년회 해야지!'라는 말로 약속을 잡고 서로의 한 해를 묻다 보면, 그렇게 또 일 년은 끝날 것이다. 그리고 하루 차이로 어색해져 버린 내 나이가 적응될 때쯤이면 날씨도 다시 따듯해져 있을 것이다.


왠지 <러브 액츄얼리>나 <나 홀로 집에>를 봐야 할 것 같은 시즌이지만, 올해 보기로(혹은 다시 보기로) 마음먹었으나 보지 못했던 영화들이 더 '연말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연말엔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보단 지난 계획을 되돌아보는 게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다이어리를 되짚어보며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 작품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1. 로우 (Raw, 2017)

채식주의자였던 주인공이 자신의 숨겨진 식인 욕망을 깨닫는다는 어마 무시한 줄거리의 프랑스 영화. 올해 BIFAN의 화제작이었지만, 영화제 기간에 관객일 수 없었던 터라 보지 못했던 작품이다. 작품을 본 지인은 "살면서 봤던 영화 중 가장 힘든 영화"라는 평을 남겼다. 힘든 건 질색인데 이상하게 보고 싶다.


2.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Like Father, Like Son,  2013)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 중에선 <아무도 모른다>를 가장 좋아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작품의 주된 서사에 집중하고 적당한 울림을 받으며, '평범'하게 관람했던 영화다. 올해, 친한 친구와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친구는 작품 속의 '두 아들'이 무슨 죄일까 라는 말을 던졌다. 나는 별 말을 하지 못했다. 아들이 무슨 감정일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고 영화를 봤었던 것이다. 왜인지 모를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들었고, 그날 일기에 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고 적었었다.


3. 캐롤 (Carol, 2015)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빌런 '헬라'는 너무 멋있었다. 토르를 함께 본 친구에게 "헬라 너무 멋있지 않냐"는 말을 연신 하며 상영관을 나섰다. 그날 <캐롤>을 다시 보겠다 다짐했다. <매니페스토>나 <블루 재스민>에서도 훌륭한 주연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케이트 블란쳇은 <캐롤>이라는 작품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캐롤>이 꽤 '연말스러운' 작품이라는 것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4. 여배우는 오늘도 (The Running Actress, 2017)

문소리 감독의 단편 3부작으로 이루어진 작품. 2015년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문소리 감독의 단편 <여배우>를 관람했었다. 여배우로 살아온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개중에도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잘 담은 작품이었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 배우가 나오는 jtbc 예능 프로그램 <전체관람가>를 보다가, 챙겨봐야겠다고 적어 둔 영화다. 포스터가 마음에 든다.


5. <기억의 밤> (Forgotten, 2017)

작품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모른 채로 극장에 가야 할 것 같은 영화다. 장항준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라이터를 켜라>는 보지 못했고,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 특별출연으로 등장하는 감독을 심심치 않게 마주한 터라, 이 작품을 통해 장항준 감독만의 연출과 개성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사실 지난주 안에 보기로 마음먹었었는데, 사정이 생겨 영화관에 가질 못했다. 다가올 주말을 다시 한번 노려본다.




따듯한 술이라면 질색을 했었는데, 요새 이상하게 따듯한 술이 맛있어졌다. 얼마 전에 좋은 술집 하나를 새로 발견했다. 대학로에 위치한 조용한 펍인데, 메뉴가 다채로웠다. 나는 뱅쇼를 한 잔 마시고 왔다. 따듯하고, 조용하고 참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근처에서 송년회를 하게 된다면 올해 안에 또 한 번 가볼 생각이다.


연말이면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북적북적 시끄럽게 보내고 싶었었다. 그러다 보면 정신없이 또 새해가 오곤 했다. 올해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먹어본다. 새로운 일 년을 맞이하는 것만큼이나, 지금 일 년을 잘 보내는 것 역시 참 중요한 일이니까.


이루지 못한 계획들은 새로운 다이어리에 잘 옮겨 적었으니, 이제 옮겨지지 않은 계획들을 지난 다이어리에서 찾아봐야겠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일 년을 다시 곱씹어보고, 박수치면서 보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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