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이 Mar 16. 2018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진저 에일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예고편 하나 안 보고 가도 기대되는 영화가 있다. 왠지 모르게 포스터가 맘에 들거나, 배우와 장르가 찰떡같이 어울린다거나, 원작이 훌륭한 작품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세 가지를 다 충족했다. 포스터는 두 배우의 구도부터 카피와 폰트까지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으며, 손예진의 멜로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고, 원작은 (비록 나는 보지 않았지만) 저명하다.

하지만 내 기대는 또 다른 세 가지 이유 탓에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하나, 역시 영화의 힘은 연출력

'아침이면 그녀는 식탁에 앉아서 조용히 사과를 먹는다'라는 문장을 읽으면 어떤 장면이 눈에 그려지는가. 나는 주말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초점 없는 눈으로 껍질 채 사과를 씹고 있는 잠옷 차림의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출근을 앞둔 세미 정장 차림의 여자와 접시에 놓인 잘 깎인 사과가 떠오를지도, 또 누군가는 가족들을 배웅한 후 잠깐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한 주부의 모습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가 이게 아닐까. 상상의 여지를 남기느냐 그렇지 않느냐. 전자든 후자든 장점도 단점도 있다. 그렇기에 관객들이 각자의 상상력을 제한당하는 데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것이 스크린의 가장 큰 숙제다.

 

이런 면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많이 아쉬웠다. 수아(손예진 분)가 첫 등장하는 장면은 일부러 의도한 건가 싶을 정도로 세기말스러웠고, 수아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우진(소지섭 분)의 모습은 나오던 눈물을 그치게 만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구도와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사운드의 연속이었다.



둘, 웃겨야 한다는 강박

러닝타임을 8개 구간 정도로 나눠서 성실하게 알람을 심어둔 듯했다. 원작과 설정이  '이 쯤되면 한번 웃겨야지'라는 강박이 그대로 느껴졌다.

물론 나도 알람에 맞춰 잘 웃었다. 워낙 연기를 잘한(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요소인) 지호 역의 김지환 배우 덕에 서럽게 울다가도, 홍구(고창석, 배유람 분)가 나오면 피식했다.


그래도 굳이 그렇게까지 성실할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특히 작품의 초중반은 웃겨야 한다는 강박 탓에 종종 과장된 연기와 무리수로 꽉 차있기도 하다. 장르와 주제를 잊은 듯 보이는, 클리셰 범벅의 코미디가 가장 아쉽다.



셋,  이제 다 설명해줄게

웃다가 울다가, 겨우 끝이 보일 무렵, 작품은 이제 설명충으로 돌변한다.


비가 오는 날 다시 돌아오겠다는 믿기 힘든 약속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수아’.
그로부터 1년 뒤 장마가 시작되는 어느 여름날,
세상을 떠나기 전과 다름없는 모습의 ‘수아’가 나타난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시놉시스 中)


시놉시스에 나왔듯, 죽은 수아가 1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5분 만에 다 설명해 버린다. '자, 이제 다 울만큼 울었지? 알려줄게!' 하는 듯한 태도에 살짝 기가 찰 정도였다. 원작을 아직 못 본탓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만, 기필코 이번 주말에 원작을 봐야겠다. 원작도 이처럼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내러티브를 취하고 있을까 봐 조금 무섭긴 하다.





연남동 초입에 위치한 단골 꼼장어 집에 갈 때면, 그 앞 슈퍼에서 꼭 진저 에일을 산다. 소주에 진저 에일을 살짝 섞어 양념 꼼장어랑 먹으면, 가히 스트레스가 쫙 풀리는 느낌이다.


진저 에일은 생강과 레몬, 고추, 계피 등을 섞은 소프트드링크로 이름은 '에일'이지만 원래 알코올은 안 들어간다고 한다. 위스키나 보드카에 섞어 마시기도 하며, '분다버그 진저비어'가 가장 유명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꼼장어집에 사들고 가는 건 '크래비스 진저비어'로 알코올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생강 맛 소맥 제조가 가능하다.

크래비스 진저비어


연남동 꼼장어 집에 꽤 많은 사람들을 데려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진저 에일로 쏘맥을 만들어서 먹었는데, 나 만큼이나 막 좋아했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내게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소울푸드 같은 건데, 그냥 까스활명수 맛이 난다며 고개를 젓거나,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을 볼 때면 괜히 서운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원래 생강을 잘 먹는다. 겨울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생강차를 마시고, 초밥이나 장어를 먹을 때면 생강을 몇 뿌리는 먹는다. 그러니, 생강 맛 소맥을 안 좋아할 리가 있나 싶다.


오늘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본 친구가, 내가 SNS에 남긴 한줄평을 보더니 내게 작품의 장점을 열심히 설명했다. 이렇게 좋은 요소가 많은데,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냐고 말이다. 이에 맞불을 놓으려던 찰나 '그래 어차피 취향의 문제인데 뭐'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뭔가 꼼장어를 사이에 두고, 생강 맛 소맥을 한잔만 더 먹어보라고 권유했던 내 모습이 아른거렸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도 누군가에겐 예쁘고 슬프면서 재미있기까지 한 영화로 기억될 수도 있지.

나는 여전히 진저 에일은 좋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아쉽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영화와 모닝 맥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