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뭐 하는 사람인가요.
나는 어린 시절 장래희망이 참 많이 바뀌던 아이였다. 오늘은 약사가 되고 싶다가도, 내일은 변호사가 하고 싶고, 또 얼마 지나면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딱히 큰 이유는 없었다. 감기에 걸려 엄마 손에 이끌려 찾아간 약국에서 만난 하얀 가운을 입은 약사 선생님이 멋있어서. 엄마가 좋아하던 드라마에 나오는 변호사 언니가 예뻐서. 매일 저녁 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 이모도 예뻐 보여서. 그랬던 것 같다. 나도 나중에 크면 저렇게 예쁘고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고 보면 내 꿈은 약사도, 변호사도, 아나운서도 아닌 예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보다 조금 더 자란 수험생 시절엔, 국어에 재능이 있었다. 남들보다 조금 빨리 읽고 쓸 줄 알았고, 딱히 공부를 더 하지 않아도 언어영역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단어를 외우는 것보다, ‘수험생 필독 도서’를 보는 것이 좋았다. 대학에 가면 하기 싫은 수학 공부는 내팽겨 두고 국어공부만 하고 싶었다.
‘그래 그럼 국문과에 가야지.’
수능을 마치고, 정시 원서 3개를 놓고 엄마와 한동안 분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엄마는 참 현명하게도 엄마가 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을 내게 제시했다. 하지만 그 나이의 내겐 그냥 하기 싫은 것을 권하는 엄마일 뿐이었다. 분쟁에서 승리했고, 정시 원서 3개는 모두 국문과를 썼다.
꿈꾸던 서울에 왔고, 한동안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했다. 물론 ‘핵심교양’, ‘필수교양’ 등으로 칭해지는 하기 싫은 공부도 있었지만, 전공과목만큼은 교복을 입은 내가 꿈꾸던 것들이었다. 매주 소설을 하나씩 읽었고, 감상을 나눴다. 가끔은 영화를 보고 내용을 분석하기도 했고, 국어로, 영어로 시를 지어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낸 후엔 ‘취업’을 위해 다시 또 하기 싫은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어떤 ‘직업’을 갖느냐는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내내, 대학을 위해 살았고, 이후엔 취업을 위해 살았다. ‘직장’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하지만 신기하고 모순적이게도 나는 친구들한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주창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취업이 힘들어도, 아무 데나 취직해서는 안된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얘였다. 근데 왜 나는, ‘직업’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했을까.
졸업 후 나는 기획자이기도 했고, 홍보담당자이기도 했고, 마케터이기도 했고, 광고회사 AE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직업이라는 것과 직장이라는 곳의 차이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직장에 가면 직업이 생기는 줄 알았던 것이다. 창피하지만 가끔 드라마에서 나오는 대리, 과장 등의 직위를 직업으로 알아 들었던 적도 있었다. 최근에 이런 말을 들었다.
"그래서 지은이 씨는 직업이 뭔데요? 여기 들어오기 전엔 직업이 뭐였어요?"
여기서 말한 '여기'는 직장이었다.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직업? 그게 무슨 말이야.. 학생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처음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떠났던 여행지에서 귀국하며 입국 심사서를 적었던 때가 떠올랐다. ‘직업’ 란에서 주춤했었고, 살짝 망설이다 ‘학생’이라고 적었다.
입이 아닌 손으로 한 거짓말이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음에도 혼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도 그거 말곤 적을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빈칸으로 두는게 더 싫었으니까. 회사를 그만뒀기 때문에, 직업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직업과 직장이 엄연히 다른 것을. 내가 소속된 어떠한 곳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토록 작아져있던 내가 조금 안쓰럽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된다. 그리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고, 이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곳을 찾게 된다면 이를 직장으로 삼아도 좋다. 나는 이 둘을 바꿔서 생각했기에 많이 작아졌었다.
그러니까 부디, 앞으론 두근거리지 말고 입국 심사서를 적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