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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Mar 20. 2017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칭따오 맥주

GREAT, Daniel Blake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오프닝과 엔딩의 수미상관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오프닝은 작품을 전부 짐작케 한다. 의료 수당을 신청하고자 하는 다니엘에게 의료 심사관은 기계적으로 같은 질문만을 반복한다. 다니엘은 자신의 문제는 심장에 있다고 끊임없이 외쳐보지만 수화기 넘어의 여자는 이런 식의 태도라면 의료심사에 불리할 수 있다며 터무니없는 질문만을 계속할 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적나라한 단면이다. 대화는 있지만 상대는 없다. 말은 오가지만 진척은 없다.



켄 로치 감독은 작품의 주제의식을 은유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분명하게 전면에 내세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제의식은 오프닝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나며 이는 부당한 복지, 내실 없는 절차와 관료주의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책임과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평범하고도 위대한 시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의 엔딩 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다니엘의 마지막 말을 전하는 케이티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런 케이티를 무덤덤하게 응시하고 있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비통함은 더해졌다. 그 어떠한 추가적인 설명도, 쓸데없는 클리셰의 낭비도 없는 엔딩은 요 근래 본 작품 중에 가장 완벽했다 느껴지며, 덕분에 엔딩 크레딧이 모두 끝나는 순간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끝난 게 맞나.라는 생각을 반복하면서.



둘, 거창한 질책 대신 담담한 응시를

허무했다. 다니엘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그저 자신의 기본적인 가치와 존엄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자신보다 한발 더 벼랑에 가까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기도 겨우 한 다리로 버티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더욱 허무했다. 한 다리로 버티고 있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눠 들고자 손을 내미는데, 정작 정부는 시스템을 유지하고자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다. 복지는 실속 없는 절차를 강요하고, 교묘하게 책임을 피해 간다. 내실이 없다. 누구를 위해 시스템은 존재하는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많은 면에서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를 빼닮았다. 자동응답기처럼 똑같은 말만을 반복하는 실업급여 관리자에게 다니엘은 고함보다 침묵을 보였고, 허무맹랑한 복지와 시스템의 민낯 앞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역시 무언가 거창한 질책을 하진 않는다. 그저 고집 세고 떳떳한 한 남자를 내세우고, 그를 담담히 응시한다. 그 어떤 르포보다 효과적이다.


갈증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속이 탁 트이는 시원함이 필요하다.


출처: http://pinkfridays.tistory.com/37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 중 하나인 칭따오의 가볍고 시원한 맛은 '맥주'라는 단어가 가진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한다. 손이 시릴 만큼 시원한 상태의 칭따오를 숨을 참아가며 마시면, 이래서 맥주를 마시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느끼한 음식이나 담백한 음식이나 그 어떤 안주에도 가리지 않고 어울리며, 무엇보다 갈증을 이겨내는데 가장 적합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칭따오 맥주 생각을 절로 하게 하는 영화였다. 작품은 답답해하는 나를 약 올리듯 담담했고, 그 때문에 왠지 울면 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의 모든 영화의 엔딩에서 눈물을 보이는 나는 결국 다니엘의 마지막 메시지와 함께 울었다. 그는 담담했고 용감했고 떳떳했다. 그러나 그 담담함 탓에 더 답답했다면, 나는 감독이 원하는 바를 잘 받아들인 것일까.



복지는 무엇일까. 함께 살아감은 무엇일까. 부인과 자신의 추억이 깃든 목공품을 팔아가면서까지 케이티와 두 아이를 도왔던 다니엘.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자신의 집을 찾아오지 않자, 다니엘의 집을 찾아 "저희를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라는 말을 건넸던 케이티의 딸 데이지. 복잡한 절차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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