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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Mar 26. 2017

최악의 하루와 호가든

삶은 어차피 연극이다.


날씨가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자 <최악의 하루> 생각이 났다면 역설적인 일일까. 은희(한예리 분)의 꼬여버린 하루를 따뜻하게 느꼈다면 이 또한 역설적인 것일까.

<최악의 하루>는 은희와 그녀의 남자들의 이야기다. 은희는 무명배우다. 그녀는 남산의 산책로를 따라 세 남자를 순차적으로 만나며, 연기 선생님 앞에서는 잘 안되던 연기를 무리 없이 해낸다. 처음 만난 남자와의 설렘, 오래된 관계에서 오는 권태, 이별이 주는 정한(情恨). 이 세 감정 앞에서 얼핏보면 그녀는 솔직하지도 당당하지도 않은 듯 보인다. 단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럼에도 그녀가 사랑스러워 보였다면 이는 역설적인 게 맞는 것 같다.





하나, 그녀가 마주한 세 가지 감정

어색한 연기수업이 끝나고 그녀는 현오(권율 분)를 만나러 간다. 그는 은희의 오래된 연인이자 아침드라마 조연을 맡고 있는 배우다. 한창 촬영 중인 현오를 위해 은희는 촬영장인 남산으로 향하고, 그 길에서 료헤이(이와세 료 분)를 만난다. 은희는 낯선 땅에서 빈 손으로 약속 장소를 찾고 있는 그를 돕는다. 료헤이의 약속 장소인 카페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보다 난감해진 상황에 처한 그를 위해 은희는 기꺼이 커피를 한 잔 한다.

둘은 서로를 소개한다. '거짓말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소설 출판기념회를 위해 한국에 찾은 료헤이와 잘 되지 않는 연기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은희는 분명 거짓말을 만드는 사람이다. 약속시간에 늦을까 서둘러 자리를 뜨는 은희에게 료헤이는 이름을 물었고, 그녀는 팬레터로 이름을 알려주겠노라 약속한다.


뒤이어 은희와 현오가 만난다.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한 그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을 쌓아갔고, 그 불신으로 인한 은희의 찰나의 감정이 과거의 연인인 운철(이희준 분)을 남산으로 소환하기에 이른다. 은희는 남산 산책로를 따라 돌며 현오와 운철 사이의 거짓말을 주워 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화도 내보고 울어도 보며 그들을 떼어놓으려 애쓰지만, 어쩐지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두 사람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모든 것을 들켜버린 은희의 처참한 모습은 영화적 연출을 통해 긍정적으로 전환된다. 은희는 지질하고 문제적인 남성들 사이에서 단지 솔직(?)하고 과감한 여성일 뿐이다. 은희가 걷는 남산에서의 걸음 하나하나에서 그녀의 감정이 묻어난다.



사람은 상대방과 어떤 관계냐보다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김종관 감독은 이를 극적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그렇기에 은희에게 '솔직'이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세 명의 남자와 둘러싸인 모든 상황에서 솔직하게 움직였다. 다만 그것들이 모여 그녀에게 '최악의 하루'를 선물했을 뿐이다.



둘, 최악의 여자가 아닌, 단지 최악의 하루

<최악의 하루>는 원래 <최악의 여자>라는 제목을 가졌었다.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에 대해 작게나마 공감하지 않았을까. 은희로 분한 한예리 배우는 '최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고,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더 꼬여버리는 그녀의 하루에 모두 함께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쳐버린 하루의 끝엔 생각지 못한 위로가 기다리고 있는 법이다. 하루 종일 벗어나지 못했던 그 지독한 길 위에서 은희는 료헤이를 다시 만난다. 은희의 서툰 몸짓이 만들어낸 완벽한 춤사위와 실재와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듯한 료헤이의 극적인 대사를 통해 작품은 마무리된다. 료헤이와 은희가 나눴던 대사 중, "왜 주인공에게 그렇게 잔인하죠?"라는 말에 미루어볼 때, 이는 실재와 허구의 만남(작가와 주인공의 만남)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마음에 드는 해석은, 작품 속 많은 캐릭터들이 그러했듯 자신의 감정만을 내세운 채 타인에겐 한없이 잔인했던 과거와 이를 극복해낸 현재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는 지독한 투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는 모순이 만나 현실적이고도 환상적인 엔딩을 만들어낸다.

료헤이와 함께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최악의 하루의 끝에서도 여전히 은희다운 발걸음이 느껴진다.




봄과 어울리는 향을 담은 맥주
호가든 로제 드래프트


벨기에의 호가든 지역에서 처음 양조되어 이름 붙여진 '호가든' 맥주는 탁한 금색을 띄는 밀맥주다. 전용잔을 통해 맥주의 2/3 정도를 따르고 나머지는 흔들어 거품을 내 마신다. 효모가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진한 맛과 적은 청량감을 지녔다. 오렌지 껍질이 들어있어 달콤하고도 산뜻한 향을 낸다.

이 자체로도 봄과 아주 어울리는 맥주이나, 작년 가을 겨울 시즌 상품으로 국내 유자를 이용한 호가든 유자가 출시됐었고, 라즈베리 향이 가미된 호가든 로제 역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나는 이를 드래프트로도 마셔봤는데, 엄청난 가격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맛이었다. 호가든 로제를 드래프트로 파는 펍을 발견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꼭 한번 마셔보시길. 또한 올봄을 맞이해 호가든 체리 역시 출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 '봄'하면 호가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겠다.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해지면 <최악의 하루>와 호가든의 조합을 느껴보시길 추천한다. 혹은 남산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호가든을 마시는 것도 좋겠다. 여전히 퀴퀴한 공기와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찬바람 탓에 봄이라고 느껴지진 않지만 그래도 봄은 올 테니까. 따듯한 봄날의 걸음걸음마다 자신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하루들이 기다리고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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