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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Mar 23. 2017

싱글라이더와 먹먹함에 대해

혼자 걸어갈 길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하루 종일 속보를 주시했다. 언제 이토록 많이 흘렀는지도 모를 시간은 1000여 일을 훌쩍 지나버렸고, 살짝 드러난 그 모습은 흘러간 시간을 정통으로 맞은 듯 보인다. 지나버린 시간에 의한 녹슬음과 인위에 의한 구멍들은 애석함을 더했고, 그 모습은 몇 장의 사진에 담겨 많은 이들의 마음에도 구멍을 냈다. 왜인지 3년이라는 세월보다 더욱 지쳐 보인다. 찬 바닷속에 잠긴 마음을 누가 그토록 괴롭혔을까.


먹먹한 마음을 해결해 줄 영화보다 그냥 먹먹한 영화에 대해 쓰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하나, 긴 길을 걷는 와중에 소중한 것을 잃지 않으려면

<싱글라이더>는 재훈(이병헌 분)의 좌절에서 시작한다. 하루아침에 잘 나가는 증권회사 지점장이라는 자리에서 추락한 재훈은 먼 곳에 있는 가족을 생각한다. 재훈은 아내와 아들을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이다. 그는 화려함과 성공만을 좇는 듯 보이지만, 한국과 시차가 한 시간밖에 나지 않는다며 가족들에게 미국보다 호주행을 권한 사람이다. 어쩌면 화려한만큼 공허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호주에서 재훈을 기다리고 있는 건 더 큰 공허였다. 아내 수진(공효진 분)의 곁엔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다른 남자가 있었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들 곁에 재훈의 빈자리는 없는 듯 보였다. 그래서일까, 재훈과 가족들은 이상하리만큼 마주치질 못한다. 이쯤 되면 어서 재훈이 수진과 얼굴을 마주하고 분노와 배신의 감정을 쏟아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재훈의 비밀은 지나(안소희 분)에 의해 꽤 신선하게 밝혀진다. 광고를 만들던 감독의 세심하고 정교한 연출은 수려한 호주의 배경과 차분한 이병헌의 연기를 잘 담아낸다. 개봉 전부터 '이병헌이 선택한 작품'이라는 수식을 받았던 탓일까. 그는 더욱 진중하고 완벽히 재훈으로 분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결국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너무나도 소중한데 잊고 살았던 것, 그래서 결국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

그 잃어버림의 주체는 단지 재훈뿐만이 아니다. 수진도, 크리스도, 지나도 그리고 지나에게 못된 짓을 범한 한국 아이들까지 모두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게 무엇이든, 어째서든, 어떻게든. 감독은 소중한 것을 소실한 사람들을 멀리서 묵묵하게 담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든 '혼자만의 여행'을 완수해야 하는 주체였다. 소실과 완수. 원하든 원치 않든 해야 하고 해내야 하는 그 두 단어가 엔딩 시퀀스의 재훈의 모습에 더해져 깊은 먹먹함을 만들어낸다.



둘, 스크린에 등장할 만한 연기?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체감 가치'는 어느 정도 일까. 가창력이 안 좋은 사람이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한다고 할 때와 연기를 못하는 사람이 배우로 데뷔한다고 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다. 또한 그 무대가 브라운관이냐 스크린이냐에 따라서도 꽤 다르다. 얼마 전에 아이돌 출신 모 가수가 자신이 출연한 작품의 언배시사에 참여했다는 기사를 봤다. 타이틀은 '모 가수, 영화배우로 돌아왔어요!'였다. 그 가수는 소속 그룹에서 노래를 못하기로 유명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다. 어차피 그가 노래도 못하고 연기도 못한다면, 만약에 배우로 먼저 데뷔하고 후에 음원을 냈을 때엔 기사에 어떤 댓글이 달릴까 궁금했다.

내가 본 기사의 댓글 중, 왜 도대체 영화배우만 한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아마 우리가 '스크린'이라는 것에 많은 가치를 투자하기 때문이 아닐까.


음악방송을 보는 도중, 노래를 못하는 가수가 나온다면 채널을 돌리면 된다. 혹시 멜론의 실시간 인기차트를 듣다가 그 노래가 들린다면, 다음 곡으로 넘겨버리면 된다. 수목드라마를 시청하던 도중 발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때문에 흥미가 떨어진다면, 다른 방송사의 드라마는 어떤지 찾아볼 수 있다. 흥미 있는 드라마가 없다면 케이블 TV나 VOD를 통해 예능 한 편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극장에선 어떠할까. 물론 출연 배우가 연기를 못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다면, 작품 선택을 고민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배우의 연기는 꼭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데 어떡하나. 일단 전자의 연기가 극에 방해가 되지 않길 바라며 극장으로 가는 수밖에.

아마 이러한 경우, 예상을 빗나가지 않을 수준의 연기를 결국 스크린에서 맞닥뜨리게 될 확률이 크다. 수백 여개의 의자가 커다란 스크린만을 응시하도록 설치된 극장에서는, 큰 결심을 하고 성큼성큼 비상구로 나가는 것 외에는 그 연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방법이 없다. 보통 나는 자리를 벅차고 나가지도, 눈을 가리고 귀를 막지도 못한다. 그냥 내 선택을 처참히 받아들일 수밖에.



아마 그래서 일 것이다. 우리가 티켓을 구매하고 시간을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불이 다시 켜지기 전까진 웬만하면 뛰쳐나가기 힘든 곳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편의 영화를 선택하는 데에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투자한다. 그래서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 보다 민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마음이 먹먹할 땐 뭘 마셔야 할까.



가슴이 답답한 것과 먹먹한 것은 확실히 다르다. 답답함을 맥주가 가진 청량감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먹먹할 때 내가 갈구하는 것은 맥주가 아니다.

답답한 마음에 맥주를 한 잔 들이켜면, 8차선 도로가 꽉 막혀있는 와중에 내 앞길만 뻥 뚫리는 쾌감이 느껴진다. 나는 멈춰있는 차들을 두고 앞으로 쌩쌩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먹먹함이 원하는 갈증의 해소는 이것과는 다르다. 그 쾌감이 아니다. 느려도 좋으니 8차선 모두 흐름을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천히라도 함께 움직이는 질서 있는 갈증의 해소를 원한다. 이를 어떤 단어로 나타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싱글라이더>는 완벽하진 않았다. 감독의 정교한 연출은 재훈과 수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는 친절하지 못했고, 귀를 잠깐 막을까 고민하게 만들었던 연기와 매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연기의 조화는 비상구의 위치를 살피게도 했다.

그래도 <싱글라이더>는 오랜만에 만난 먹먹한 영화였다. 좋은 요소들이 조화되어 훌륭한 시너지를 낸 것은 분명하다.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도 이를 풀어나가는 시선과 서사도 좋았다. 꽤 깊이 다가왔으니 꽤 길게 먹먹했다.



많은 사람들이 <싱글라이더>처럼 혼자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어디가 끝일지 모를 그 길이 내게도 꽤 많이 남아 있을 것 같다. 무언가를 잃지 않고 이 길을 완수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저기서 봄이 올 거라고 하는데 아직도 두터운 겨울옷을 못 넣고 있다. 내일은 더 좋은 뉴스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옷장에서도 마음에서도 빨리 봄옷을 꺼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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