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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열 Sep 24. 2017

수제맥주? 맥주는 원래 수제였다.

미개한 공산품으로 전락한 인류 최대의 즐길거리의 반란

"수제맥주"의 인기가 뜨겁습니다.


조금이라도 번화한 거리에서는 여지없이 보이는 입간판. 페일 에일이니, 바이젠이니, 독일산 홉이니, 몇 년도 어느 대회 수상작이니, 온갖 생소하고 좋아 보이는 단어는 다 붙어 있으니 마치 '요즘 누가 수제맥주 아닌 맥주를 먹어?' 라며 은근히 깔보는 듯도 합니다. 어쩌면 '한국 맥주는 북한의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던 이코노미스트 기자 다니엘 튜더Tudor의 혹평도 한 몫 했을 겁니다.



대체 수제맥주가 뭐길래?


수제맥주라고 맥주를 손으로 빚었을 리도, 수제맥주가 아니라고 손을 쓰지 않고 만들었을 리도 없지만, 대개는 '정성들여 조금씩 만든 비싼 맥주' 정도의 뜻으로 통합니다. 영어 표현을 빌려 크래프트craft 맥주라고도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장에 가까운 대기업에서 일률적인 레시피로 대량으로 찍어낸 맥주가 아닌, 소규모 양조장에서 저만의 레시피로 소량 생산한 맥주를 말합니다.


하지만 소규모 양조장, 혹은 크래프트 양조장, 더 전문적인 표현으로는 마이크로브루어리microbrewery가 될 수 있는 기준도 참 모호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크래프트 양조장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의 2010년 생산량이 9224만 리터였습니다. 클라우드와 피츠를 만드는 국내 제3의 맥주회사 롯데주류의 연간 생산량이, 올해 제2공장을 가동하기 전까지 1억 리터였으니, 칼로 무 자르듯 생산량으로 양조장을 분류하지는 않나 봅니다.


시에라 네바다 페일 에일


시에라 네바다의 맥주가, 어마어마한 양조장 규모에도 불구하고, 크래프트 맥주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다소 자명하게도 양조장보다는 맥주에 있습니다. 시에라 네바다는 1980년 '페일 에일'이라는 스타일의 맥주를 만들었고, 이 즈음 시에라 네바다를 포함한 소규모 양조장들이 '페일 에일' 혹은 '인디아 페일 에일' 스타일의 맥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크래프트 맥주 유행의 시초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타일의 문제다.


오늘날 수백, 수천 곳의 크래프트 양조장에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니, 병의 뚜껑부터 바닥까지 너무나도 다른 셀 수 없이 많은 맥주들을 만들어 냅니다. 시에라 네바다가 만들었던 '페일 에일' 스타일부터, 맥주라고는 믿기지 않는 벨기에의 에일 스타일, 크래프트 맥주가 아닌 대기업의 맥주와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황금빛 라거 스타일까지, 보리의 발효를 기본으로 했다는 점만 같을 뿐 서로 다른 유래와, 재료와, 레시피와, 맛과, 색깔과, 알코올 도수와, 가격까지도 다른 수많은 스타일의 맥주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맥주를 만드는 방식과 재료, 심지어 그 유래까지 고려해 맥주를 여러 가지 스타일로 분류했는데, 그 갯수가 100개가 넘을 정도로 세상에는 다양한 맥주가 만들어지고, 또 소비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드는 곳이 바로 세계 각지의 크래프트 양조장들입니다.


맥주 스타일을 도표로 정리한 Beer style map


반면, 크래프트 맥주라고 불리지 않는 상업적인 맥주들은 하나같이 샛노랗고 탐스러운 황금빛 빛깔에, 톡 쏘는 탄산감, 쌉쌀한 끝맛까지 비슷해 라벨을 가리면 어떤 맥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맥주들이 전부 하나의 큰 스타일, 넓게 봐야 서너 가지의 스타일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맥주 판매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맥주 대기업들은, 100여 가지의 맥주 스타일 중 가장 원가가 저렴하고, 사람들에게 익숙하며, 적당히 싱거워 많이 마시기에 적합한 스타일을 골라 공장에서 찍어냅니다.


크래프트 맥주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맥주란 바로 이러한 '페일 라거' 스타일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페일 라거가 아닌 맥주가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하고, 국내에 상륙해 '수제맥주'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제맥주는 억울하다.


사실, '페일 라거' 스타일의 맥주는 19세기에서야 발명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유럽에서는 지역마다 저만의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맥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체코에서 만든 황금빛 맥주가 들어오더니 동네 사람들의 입맛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렇게 버려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맥주가 여럿, 그나마 몇몇 맥주만이 소수의 기억에 남아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수제맥주가 다시금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천편일률적인 황금빛 맥주에 질린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맛과 향의 맥주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때 어디선가 많은 사랑을 받았던 맥주들을 다시금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오늘날의 과학 기술에 힘입어,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어, 그리고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와 만나 더욱 맛있는 맥주, 다양한 맥주로 진화해 점점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크래프트 맥주 붐'입니다.


수제맥주는 단지 상업적이고 특색 없는 맥주에 질린 사람들이
맥주를 조금 더 맛있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문명의 탄생에서부터 인류가 발전시켜온 문화,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과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문화입니다.


맥주, 얕보지 마세요


맥주는 인류가 계승해 온 가장 크고 찬란한 문화 중 하나입니다.


무려 기원전 15000년, 지금의 터키 근처의 사람들이 맥주를 만들어 먹은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인류는 사실상 농사를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양조를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3000년, 수메르인은 맥주를 가리켜 '입이 원하는 것'이라는 뜻의 어휘를 사용했습니다. 맥주는 인류의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여가 문화였습니다.


보리는 비교적 추운 기후의 북유럽에서 잘 자라는 반면, 로마가 있는 남유럽에서는 포도가 잘 자라기 때문에, 북유럽에서는 맥주를, 남유럽에서는 포도주를 주로 마셨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기독교를 통해 문화적 주도권을 잡자, 남유럽의 포도주는 고급스러운 문화가 되고, 북유럽의 맥주는 미개한 문화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지중해가 아닌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는 빵과 포도주가 아닌 소시지와 맥주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맥주, 알고 마시자


맥주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가장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술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12명의 신 중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포함될 정도로 인류가 사랑하는 술의 문화,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맥주입니다.


물론 맥주는 즐기기 위해 먹는 것입니다. 맥주를 마시는 일에 머리아픈 설명이 동반하는 것도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마시는 이 맥주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만들어져 어떤 맛이 나는지를 알고 먹는다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앞으로 한 달에 하나씩, 그 달에 어울리는 스타일의 맥주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맥주는 기가 막힌 탄생의 비화를 가지고 있기도, 어떤 맥주는 알고 보면 신기한 과학적 원리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모두 알고 먹었을 때 비로소 향유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문화의 즐거움을 경험해 보세요.



이 시리즈는 2016. 9. 부터 2017. 7. 까지 대한민국 공군 인트라넷 내의 교양카페 <휴머니스트>에 <이 달의 모범맥주>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합니다. 많은 공군들이 얻어간 맥주의 즐거움을 더 많은 분들에게 드리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맥주 문화가 더욱 융성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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