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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스켓 Jan 04. 2017

파리에서 반나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프랑스 파리



아이슬란드로 가는 저가항공을 타기 위해 잠깐 경유했던 도시, 파리. 덕분에 우리에겐 파리에서 반나절의 시간이 주어졌어. 경유 도시가 왜 하필 파리였냐 물으면 현실적으로는 비행기 값이 저렴했다 말할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그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실토할 거야. 나는 파리를 좋아해. 파리 특유의 낯선 느낌도 좋고, 흐린 날씨가 어울리는 우울함도 좋고, 햇빛이 쨍할 땐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풍경을 보여주는 것도 좋아.





"우리 파리에 가면 뭐할까?"


그는 나에게 이 질문을 몇 번이나 던졌어. 왜냐하면 우리에겐 반나절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왠지 마음이 급하기도 하고, 어슬렁 대며 걸어 다니다가 눈 앞에 나타나는걸 보기엔 시간이 여유롭지 않으니 무언갈 딱 하나 집어서 봐야 하나 싶기도 하잖아.


하지만 난 아무 생각도 들지가 않았어. 나에게 파리는 이미 세 번째 방문하는 곳이었고, 그도 처음은 아니었거든. 내가 파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언갈 봐야 할 것이 있어서, 그걸 보아서가 아니라 그냥 거리를 걸어 다니는 그 느낌 자체가 행복해서였어.





파리의 지도를 펴고 보면 오른쪽에는 시테섬이 있고 왼쪽에는 에펠탑이 있어. 그 끝과 끝을 센 강이 잇고 있는데, 강가를 따라 걸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 강둑에는 젊은 청년들이 맥주를 마시거나 데이트를 하고 있고,  노천카페에는 어르신들이 추위도 잊은 체 커피를 마시고 있지. 그런 풍경 속을 그냥 걷고 싶었어.





루브르 박물관을 시작으로 걷자고 그가 말했어. 루브르 박물관에서 에펠탑까지 센 강을 따라 걷는 길이 정말 낭만적이라고 말했던 내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나 봐. 루브르 박물관까지는 메트로를 타기로 했어. 메트로를 탈 때면 낭낭하게 여유를 부리던 나도 살짝 긴장이 되었어. 그는 그런 나를 보면서 '에게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지.


파리엔 소문이 무시무시하게 많은데 그 소문 중 대표적인 게 '공포의 북역'이야. 북역은 유로스타나 RER 같은 기차를 갈아타는 교차역이라 여행자들이 많이 거쳐가는 곳인데 그래서 집시나 잡상인들도 많아서 소매치기가 잦다는 소문이 자자했어. 2년 전에, 메트로를 탔는데 같이 동행했던 친구 가방으로 까슬까슬 해 보이는 손이 쓱 들어오는 거야. 순간 너무 놀래서 친구 가방을 내가 낚아챘는데, 말로만 듣던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니까 정말 당황스럽더라고.


그 후에 메트로를 몇 번 더 타면서 긴장이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맘 편한 장소는 아니었어. 배낭을 메고 있다가도 메트로만 타면 가슴 쪽으로 배낭을 안고 있는다거나, 카메라를 손에 꼭 쥐고 있는다거나. 그런 긴장된 내 모습이 그의 눈에는 웃겨 보였나 봐.





나는 파리에서 에펠탑만큼 황홀한 곳이 루브르 박물관이라고 생각해. 저번 여행 때 두 번이나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했지만 기억에 남는 작품은 몇 개 안돼. 그중에서 아직까지도 인상 깊게 기억나는 작품은 '승리의 여신 니케'라는 조각상이야.




그리스 신화에서 니케는 아테네 여신과 함께 다니며 승리를 이끌어 주는 신이었어. 인상적인 건 니케상의 몸인데, 레이스처럼 얇은 천이 바람에 날려 살갗에 닿는 모습을 정말 정교하게 조각으로 표현한 거. 그림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작품이 많지만 조각 작품은 균형 감각이나 빛의 방향까지 고려해서 만든 걸 보면 정말로 놀라워.





박물관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진동했어. 10월이면 추울 줄 알았는데 하늘도 맑고 바람도 선선한 최고의 가을을 품은 파리가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어. 여행의 8할은 날씨가 차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날씨는 우리의 기분을 좌지우지하는데, 이때 파리의 날씨는 우리의 행복 지수를 가득 채워주는 역할을 해주었어.



 


"우리는 배낭여행 땐 꿈도 못 꾸던 에펠탑이 보이는 호텔에서 촌스럽게 호들갑을 떨었는데 

내심 함께 그러는 우리라서, 나와 비슷한 너라서 참 좋았다. 

밤엔 제법 쌀쌀했고 바람도 많이 불었지만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고철 덩어리를 보며 한참을 누워 있었다. 

오늘처럼 에펠탑이 커 보이고 꿈같이 느껴졌던 날도 드물 것이다. 

올 때마다 항상 같은 생각을 한다. 내가 언제 또 여길 올 수 있을까?"


_10월 4일 파리에서의 일기





카루젤 개선문. 난 이 개선문을 두고 루브르 박물관과 튈를리 정원을 이어주는 역할이라고 말하고 다녀. 실제로 저 개선문을 지나면 파리에서 최고로 넓은 튈를리 정원이 눈 앞에 펼쳐지거든.





파리에는 유명한 공원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도 난 튈를리 정원을 가장 좋아해. 우선 파리의 중심에 있어서 몇 번이나 지나치며 정이 들 수도 있고, 넓은 공원 주변으로 높은 건물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시야가 탁 트이는 것도 너무 좋아. 낮이건 밤이건, 여름이건 겨울이건 사람들은 잔디나 초록색 의자에 앉아 이 풍경을 만끽하고.


파리에 올 때마다 이 곳을 찾지만, 좋지 않은 순간이 한 번도 없었어.





나는 사진 찍는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순간순간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으면 그냥 사라지거나 희미해져 버려. 사진을 보면, 그때 그 순간이 되살아 나잖아. 거기에 글까지 덧붙여 놓으면 더더욱 선명하게 남겠지.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짧은 일기라도 남기고 잠들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했거든. 그걸 지금 들춰 보니까 그때의 따끈따끈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더라고. 지금 똑같은 사진을 보고 일기를 쓰라고 해도 그런 글은 절대로 써지지 않을 거야.





파리의 가을은 처음이었는데 그 느낌이 여름이랑은 확연하게 달랐어. 아직 초록잎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 추운 느낌은 아니었는데, 바닥에 흩뿌려진 낙엽이 가을임을 증명하고 있더라고. 커다랗게 말린 낙엽을 팟, 하고 밟으면 푹, 하고 꺼지잖아. 나는 낙엽 밟는 소리가 그렇게 좋더라. 튈를리 정원을 걸으면서 내내 낙엽만 쫓아다닌 거 같아.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리를 건너면 오르세 미술관이 나오고, 또 거기서 에펠탑 방면으로 걸으면 알렉상드로 3세 다리랑 앵발리드가 나와. 센 강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파리의 유명 명소는 거의 다 만날 수 있을 정도지. 


예전에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땐 지도도 하나 없이 다녔는데, 그땐 나폴레옹 군사 박물관인 앵발리드가 사이요궁인 줄 알고 거길 찾아가서 대뜸 여기서 에펠탑이 제일 잘 보인다고 했는데 왜 하나도 안 보이냐며 구시렁 대기도 했어. 그 정도로 무식하게 여행했던 거야, 내가 가는 곳이 어디 있는지 위치 확인도 안 한 체.





혹자는 파리가 영화나 소설 같은 매체에 자주 등장하면서 실제의 아름다움보다 더 과장되었다고 말해.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 파리가 매체에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감성을 어느 정도 자극한 건 맞겠지만, 실제로 파리를 걸어 다니다 보면 그게 절대로 과장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남자 주인공이 파리라는 도시를 끊임없이 예찬하고 동경하거든. 바람이 불어도 아름답고 비가 오면 더 아름답고, 소설가로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파리의 분위기를 느끼며 글을 쓰면 헤밍웨이 같은 작가가 탄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나는 그 남자 주인공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도 같아. 파리는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분위기에 매료되는 도시니까.



"아직도 파리에 다녀오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군요.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_헤밍웨이/파리는 날마다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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