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못 그려도 디자인할 수 있다고!
그림도 못 그리면서 어떻게 디자이너가 됐어?
담당하고 있는 디자인 분야에 따라 다르지만,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BX / UX / 서비스 디자이너입니다. 패션 디자인이나 산업 디자인과 비교해서 비교적 그림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상관없는 분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그림을 못 그립니다.
잘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은 하기도 해요.
다만 굳이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지요(이건 다음 연재 때부터 천천히!).
더 넓은 의미의 디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간혹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일러주세요(혹여나 깐족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 그림을 잘 그렸으면 분명 더 메리트가 있었겠지만, 나는 '디자이너 =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너와 이야기하기는 원론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벌써부터 지치려고 해"
라고 말이죠.
얼마나 못 그리는지 알려드리기 위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공인을 그렸습니다.
욕 나오죠?
저도 그리면서 욕 나왔어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그러니까 90년대 초반부터 좋아하던 분을 이딴 식으로 그리다니...
입만 그렸는데도 하나도 안 닮은 것 같네요.
특징은 잡았는데 안 닮았어요. 그분은 훨씬 잘생겼거든요.
제가 이 정도로 그림을 못 그립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그림이란 것을 그려보니 재미있더군요.
참고로 저는 미술학원을 초등학교 1학년 때 1년 다니고 그만두었습니다. 이후, 학교 미술 수업은 그냥 그냥 웬만큼 잘하는 편이었는데, 성년이 되어 어째 저째 일본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이라는 곳에는 합격하여...
학과가 영상학과라 실기 시험이 '감각 테스트'라는 것이어서 데생이 아니었기에 합격하는 영광을 얻었죠.
※감각 테스트는 주제에 맞춰 글 반, 그림 반으로 보는 무사시노 미술대학 영상학과 자체 시험입니다.
이후, 1학년 1학기 때 느꼈어요.
워낙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이 많았기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따로 있구나!'라고 말이죠.
물론 그들은 오랜 시간 그림을 연마해 오기도 했고, 그림에 재능이 있기에 무시 못할 얘기입니다.
아무튼 미대 1학년 때 누드 크로키도 해보고, 조각도 해보고, 별의별 미술 기초 실습은 다 받았지만,
저는 조각 빼고는 그냥 평범한 성적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늦은 나이에 대학 4년을 또 배운다고 하니, 그림을 못 그리니, 입학 후 첫 1년은 굉장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어요.
'이럴라고 내가 만 22살에 다시 대학생이 되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왠지 모를 열등감에 빠져 2학년 때부터는 자는 시간 4시간 빼고 하루 온종일 앉아서 영상 작업을 했습니다.
물론 미술 센스가 없는 것보다 있는 편이 디자이너로서 스타트는 확실히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이라는 게 '미학'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대학 때 배웠던 것은 정말 기본의 토양이 되는(그 경험이 있었기에 깊이 깨달을 수 있는 부분도 포함) 마인드와 개념을 쌓는 것이지 않았나 싶네요.
이후 신입사원으로 광고대행사에 취업한 이래, 저는 웹 디자인 중심의 시각 디자이너로서 성장해 왔는데요.
그저 전문대학에서 컴퓨터 시각 스킬만 키운 사람들과 기본적인 토양을 쌓아온 이들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스킬로도 충분히 사회에서 훌륭히 첫 스타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디자인은 스킬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보기 좋음'에 대해 젊었을 때 남다른 감각을 길러 왔는가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기도했습니다.
미학에 대한 개념과 이념이 긴 세월 미적 센스와 함께 확실히 자리 잡은 '호흡'이 느껴지는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 관련 대학생활은 무시 못하는 경험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철학에 대한 개념과 이념을 쌓은 이도 센스가 조금만 있다면 충분히 디자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엔지니어링 기술을 쌓은 이도 디자인을 접목해 성장할 수 있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디자인과 미술의 큰 차이점은,
디자인은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미술은 '자신의 이념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공표된 후, 디자인은 얼마나 편리해지고 문제가 개선되었으며 기발하면 더 좋고!인데 반해,
미술은 사람들이 나의 확고하고 훌륭한 이념에 공감을 갖아주면 좋고, 의문을 갖아주어도 좋고, 아름다움을 느껴줘도 좋고, 개념에 대해 반발해도 좋고...
작가의 생각과 표현에 대한 사람들의 어떠한 반응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미술로 하는 작가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따진다면 미술이라는 분야가 어쩌면 조금 더 열려 있을 수 있겠네요.
그래서 제 마음대로 정리하자면,
디자인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미술을 하는 사람보다 조금 더 '대다수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태도'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디자인 분야에서는 문화인류학자, 심리학자, 엔지니어, 기술자 등등의 많은 사람들과 협업을 하고 있어요. 결국은 '대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지요.
미국의 IDEO라는 디자인 컨설팅 회사가 이러한 디자인 업계의 폭과 깊이를 넓히기 위해 늘 선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대학원에서 지겹게도 들었죠. 선진 사례를 쫓으려고 하는데 잘 안되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아직도 '디자인'은 그저 '그림'으로 치부하는 경영인과 회사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현실은 늘 이상과 거리가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정작 큰 대기업 이외의 회사에서는 아무도 IDEO 같은 폭넓은 이해와 깊이 있는 고찰을 한 사람을 원하지 않아요. 그저 오너 혹은 선배, 팀장이 원하는 대로 그림으로 만들어 주는 디자이너를 원할 뿐이지요.
제가 그 갭gap 때문에 2012년부터 한참을 방황했습니다.
한국의 많은 중소기업을 다니며, 이러한 이상적인 디자인 프로젝트가 가능한 곳이 있을까 찾아봤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없습니다(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너가 되어보기로 하여 작년부터 약 1년간 창업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1인 기업이지만, 작게 소자본으로 유통업을 해봤죠.
나름 중소기업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탁상공론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겪어봤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경영 컨설턴트며 디자인 컨설팅이며 브랜딩 회사며... 이론을 가지고 전문화시켜 말하는 사람들 말이죠. 이론은 분명 필요하지만, 대기업들에게만 특히 유용합니다.
소기업이나 작은 자영업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지요... 물론 오너가 중요성을 인지해주면 좋겠습니다만, 여유가 없어지더라고요. 큰 자본 하에 가능한 이야기가 많더군요... 탁상공론s는.
잠깐 있었지만 일본의 대형 광고대행사에서 2년 반 동안 근무하던 때를 회상해보면, 일본도 이런 현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적은 돈으로 사람을 쓰고 싶고, 디자이너는 특히 넘쳐나기 때문에 아무나 저임금으로 내(오너)가 얘기하는 것을 그림으로 구현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현실 말이죠. 늘 고지식한 클라이언트가 위에 있어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근무환경 개선을 한다한다 말만 많지, 결국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니 시키는 대로 해'라는 마인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겪어본 바로,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이해의 폭이나 기회는 우리나라보다는 많은 편인 것 같습니다.
'그림 못 그리는 디자이너'라는 제목으로 별의별 얘기를 다했네요.
앞으로 조금 더 파고 들어서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 매거진을 연재할까 합니다.
디자이너 경력이 긴 편은 아니지만, 여태껏 쌓은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요:)
제가 쓰는 다른 매거진은 다 에세이라 말을 짧게 했지만, 이 카테고리는 여러분과 대화하듯이 쓰고 싶네요.
그럼!
더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