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갠 Jun 02. 2017

욜로녀, 일본에서의 20대(1)

멋있게 사는 거야

욜로녀는 사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간섭이 싫었다.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가정환경, 학창 시절 환경 탓인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했겠지. 여하튼 부모님 두 분 다 공무원이라는 것이 어린 나이에 '멋없음'로 다가왔던 것 같다(지금 보면 국내선호도 1위의 안정적인 꿀직장인데...).


그래서 '멋있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굳이 점수를 낮춰 서울 밖의 '영화영상학과'를 선택하는 고집으로, 부모님의 의견에 맞서 싸웠다. 사춘기 청소년처럼 고리타분한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멋없음'에 대해 저항하려고 했다.


다만, 열정과 욕망으로 가득했던 스무 살 어린 나이에 메이저 영화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으로,

한국 영화판에 대해 실망한 나는 '이 곳은 내가 갈길이 아닌가 보다' 싶었다.

너무 섣부른 판단일 수 있겠지만, 솔직히 일단 인간들이 더러웠다. 조금 더 개인주의적이고 깔끔한 나라를 찾게 되더라.


그리하여 영화 연출 중심의 대학을 휴학하고,

뭐라도 목표를 설정해야겠다 싶어 '난 백남준처럼 되고 싶어!'라며 무작정 떠난 일본.


사실 나는 혼자서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용케도 부모님을 설득하여 일본 유학에 대한 허락을 받기도 했다. 연고도 없는 곳에 혼자 간다고 하는데 21살 어린(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어림) 여자아이를 유학 보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신기할 따름이다. 


다니던 대학에 휴학계를 내고 일본에 간다며 3개월간 일본어(일본 드라마)에 빠져 지내는 내 모습을 주변에서 보고,


"너 왠지 1년 안에 돌아올 것 같아"

라고 했었으나,


이후 나는 8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다.




[비자 해프닝]


유학원을 통해 2~3개월 동안 일본어학원 준비를 하고 나서 온갖 송별회를 하고 2004년 1월 5일, 나는 과감히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유학원에서 비자를 마련하는 것을 깜박해서 참으로 '멋없이' 공항에서 돌아오는 해프닝을 겪었다.

다음 날 관광비자를 받기 위해 영사관을 찾았고(당시 관광비자도 영사관에서 발급받아야 했었다), 돌아오는 길에 종로 길 한복판에서 어깨에 하얀 새똥을 맞아 편의점에서 물티슈를 구매하고 어깨를 닦았으나, 잘 닦이지 않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꼬리꼬리한 똥내를 맡아가며 썩스한 기분을 만끽했다.


결국 유학원에 비자도 확인 안 한 담당자에게 클레임을 걸어 다시 구매한 항공권으로 1월 8일 재출국.

일부 친구들은 그 당시 내가 1월 5일에 출국했다고 알고 있었으나, 사실 3일 뒤에 다시 출국하는 해프닝을 겪었다.


눈물이 많은 울 어머니는 두 번을 우셨다.



[일본어학원 입학]


사실 내심 일본을 즐기며 어학원만 다니다가 복학하려 했으나, 부모님께는 굉장한 포부로 일본에 가는 것이라고 설득하여 어느 정도 지원을 약속받은 터였다.


다행히도 일본어가 나에게 잘 맞았다. 재미있었다.

특히 츠(つ)와 스(す) 발음과 죠(じょ)와 zㅗ(ぞ), 제(じぇ)와 zㅔ(ぜ) 발음을 구분 잘했던 사실로 인한 콧대 상승이 언어 습득을 즐겁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3개월 독학만으로 1년 이상의 클래스에 배정받았으니, 그 쾌감이 당시에는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암기와 일본 드라마로만 독학했던 일본어라 생활 일본어를 익히기엔 어학원에 한국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한국인 50%, 중국인 20%, 미얀마 등 기타 국적자 나머지 정도로 일본어학교는 내가 일본어만을 습득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본인을 만날 수 있는 환경도 갖춰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일교류회 같은 모임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왠지 찌질이들의 모임일 것 같아서 참여하지 않았다.

같은 어학원의 몇몇 학생들은 어학을 빨리 습득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고 하여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나는 일단 M미술대학이라는 미술대학 중에서 초하이클래스 학교를 타깃으로 잡았기에 아르바이트할 겨를이 없었다. 사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들의 언어는 별로 유창하지 못했 것도 한 몫했다.


어학원 친구들과 가끔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일단 내 목표는 대학을 다시 입학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루 6시간은 일본어로 된 수필 에세이등의 서적들을 파고, 회화를 위한 TV 시청(시청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공부스러운)을 위주로 공부하였다.


그리고 전자사전과 수첩을 끼고 다니며 되도록 길거리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모스버거에 앉아 3~4시간 공부를 하고 있다가 옆 테이블의 사람들의 대화에 자연스레 합류하게 된다거나... 여자애들의 수다를 녹음해놓고 따라 한다거나...

오지랖을 총출동시켜야 그 나라 언어는 빨리 습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몰두하던 젊은 내 모습, 스스로 생각하기에 조금 멋졌다.

30대에 들어서는 어째 '몰두하기'가 잘 안 되는 걸까...



[대학 진학]


22살의 대학 입학하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로, 나는 원하던 M미술대학 영화영상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떨어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뜻밖의 선물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새 환경, 룸메 없는 나만의 집, 새 학기의 설렘...

매일 지하철 교통비 130엔씩 아껴 2 정거장을 걸어 다니며 그 돈으로 맥주 작은 캔 하나를 사 마시고, 룸메들의 수다에 시끌시끌했던 공동생활을 하던 어학원생에서,

건물이 아름다운 미대를 다니며, 홀로 생활하는 자립심 있어 보이는 대학생으로서 다시 스타트하니 마치 인생을 리셋한 것처럼 한동안 들떠있었다.


그리고 무작정 놀지 않으리라!

한국에 다시 가지 않을 수 있도록 공부도 열심히 해서 영상계의 거물이 되자!라는 무모한 꿈을 꾸고 대학생활을 미친듯이 즐기며 미친듯이 열심히 했다.


졸업 후 멋있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상상하면서...





'일본에서의 20대'는 사실 20대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인생 최고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나름 알차고 멋있었다.

감정 기복과 희로애락의 쓰나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취의 농도도 짙었고, 좌절의 폭도 컸다.

20대에 절정을 찍고 나는 다시 '멋있음'을 잃어가는 30대의 중반을 넘어섰다.

(아! 일본 가면 인터내셔널 에이지로 돌아간다!) 30대 초반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일본에 다시 간다면 한 번 더 '멋있음'을 의식하며 멋있게 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욜로녀, 취직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