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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바꿈 May 05. 2023

산소 호흡기로 버티고 있는 13년 차 아파트

이사를 가야 하나? 고쳐가며 살아야 하나?

여기서 삐꺽 저기서 삐꺽 13년 차 아파트가 산소호흡기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조명은 큰아이 방부터 형광등 안정기가 수명을 다했고, 뒤를 이어 거실 터치스위치(조명, 보일러조절), 인터폰이 숨을 헐떡거리며 심장 마사지를 요청했다.  보일러는 각방에서 조절한다 치지만 조명 스위치는 대책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전기기술과 IT기술이 요구되는 치료는 어쩔 수 없이 전문의를 불러야 했는데  누군가 왕진한다는 건 진료 여부와 상관없이 출장비를 드려야 했다.  그나마 치료라도 가능하면 모를까 이식수술 밖에는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으면 구하기 어려운 10년 넘은 부품은 제법 큰 금액이 들어갔다.  이렇게 우리 집은 산소호흡기로 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카톡" 아내가 유튜브 url를 보내왔다.  클릭해 보니 싱크대 수전 교환 영상인데 무척 친절한 유튜버가 능숙한 솜씨로 누구나 싱크대 수전을 교체할 수 있다면서 친절하게 담아낸 콘텐츠였다.  "오빠 사람 부르면 저번처럼 충격받을 거야! 내용 보니까 교체할만하던데? 직접 해 보면 어떨까?"  "대신 수전을 튼튼하고 예쁜 걸로 골라봤어" 아내는 이미 출장비를 아낀상태였고, 비싸고 튼튼해 보이는 수전을 구입한 쇼핑몰 url까지 이어서 보내왔다.  뜨악!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다시 영상을 집중해서 봤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해보자!' 


난생처음 코앞에 닥친 싱크대 수전 교체는 전문가가 아니라면 엄두 낼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 살아왔기 때문에 이곳저곳 이론탐색을 해야 했지만, 대한민국은 이미 초특급 물류 시스템을 갖춘 국가였다.  싱크대 수전은 하루 만에 배송됐고,  퇴근 후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유튜브 영상대로 몽키스페너를 잡았다. 영상에서는 손쉽게 수전 교체를 완료했지만, 나는 싱크대 밑으로 고개를 박고 10년 이상 끈끈하게 자리 잡은 육각볼트를 푸는 과정에서 목통증이 극에  달했다. 고압호스에 남아있던 물이 얼굴을 강타하면서 땀과 물로 범벅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각볼트를 풀어내는 영광을 맛봤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결국 1시간 만에 수전교환은 성공했다. (유튜브에서는 5분도 안 걸리는 쉬운 작업이라고 했음)  음.. 물도 잘 나오고 수압도 정상이다. 


싱크대 수전 교환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와이프는 비싼 수전 주문하고 남편 고생시키고,  전문가를 또 불러야 하는 줄 알고 몹시 긴장했다고 한다.  물 한 방울 새지 않고 수압도 강한 예쁜 수전도 좋고, 이걸 해내는 남편이 있어 든든하단다.  이쯤 되자 나는 은근 성취감을 맛보게 됐다. 


이날 이후 물새는 세면대 수전까지 교체방법을 알아보고 카트리지만 교환하면 고칠 수 있다는 영상을 찾아 가볍게 교환했다. 내친김에 집수리 공구세트까지 장만했고, 잘 열리지 않던 베란다, 세탁실 문도 예쁜 손잡이로 바꿨다. 방금 전에는 변기 필밸브와 고압호스를 교체하고 식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그래 이제 두렵지 않다.  아직 거실, 아이들 방, 부엌, 식탁 조명들이 산소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지만 나름 인턴급(?) 의사가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LED조명을 열심히 서칭 중이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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