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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바꿈 Jun 10. 2023

따끔은 순간 뿌듯은 영원

헌혈은장 수상 수기

 철근을 씹어 삼켜도 끄떡없던 단단한 젊음이 내게도 있었다. 도시락은 2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삼켜버리고, 점심시간에는 배가 등가죽에 붙을 때까지 농구하다가 주머닛돈 다 털어 빵과 가락국수를 흡입했던 날! 학교 안으로 하얀 적십자 버스가 들어왔다.  


 음악수업과 체육수업이 있는 학생은 단체 헌혈을 준비하라는 방송이 각반 스피커로 울려 퍼졌다. 헌혈에 참여하는 학생은 2교시 단축수업과 더불어 초코파이, 과자, 음료수까지 준다는 안내방송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시간 교실에서는 헌혈을 주제로 난상토론이 펼쳐졌다. 헌혈하면 에이즈에 걸린다는 녀석을 시작으로 빈혈로 쓰러진다는 내 짝꿍, 심지어 백혈병에 걸린다는 말도 나돌았다. 일부분 신빙성이 있는 주장도 있었지만, 팔 한번 걷으면 단축수업과 초코파이, 음료수까지 챙길 수 있는 기막힌 선물을 놓칠 순 없었다. 강당에는 이미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고, 백의천사 누나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내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것은 가득 쌓여있는 초코파이 상자였다. 1989년 11월 15일 따끔하면서 흐뭇한 나의 첫 헌혈이 시작된 날이다.  


 교실에서 나돌던 헌혈 괴담은 근거 없이 떠도는 쓸데없는 이야기로 마무리됐다. 체구가 작거나, 건강이 안 좋은 친구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채혈했었고, 모두 건강한 상태로 졸업했기 때문이다. ‘따끔은 순간 뿌듯은 영원' 슬기로운 헌혈을 몸소 체험한 나는 이후 단짝 친구와 경쟁하듯이 때가 되면 버스에 올라타 팔을 걷어붙였다. 혈기는 왕성한데 남들 다 있는 여자친구가 없었던 나는 같은 조건(싱글)을 갖추고 있던 친구와 손 꼭 잡고 끓어오르는 피를 줄기차게 뽑아냈다. 바늘 경험이 많다 보니 군대에서도 거부감 없이 헌혈과 훈련을 맞바꾸고, 재수 좋은 날에는 라면도 얻어먹었다. 특히 군대에서 벌어진 사고로 생명이 위독한 전우를 위해 모아둔 헌혈증을 기부했던 날은 내가 나에게 특급칭찬을 쏟아붓는 경험을 맛봤다. 제대 후에도 헌혈 인센티브는 계속 이어졌는데 예비군훈련, 민방위 훈련 시간을 적십자 버스 속 채혈 의자에서 편안하게 맞바꿨다.


 릴레이 헌혈은 아내와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 느슨해졌다. 헌혈이라는 단어조차 잊을 만큼 연애의 맛은 날카로웠다. 결혼 후 세 자녀 아빠가 되면서 직장생활에 더욱 집중(충성)하면서. 헌혈은 긴 시간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가끔 회사가 밀집한 곳에 헌혈캠페인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업무시간 자리를 비우고 침대에 눕는다는 그 시절 직장 문화에서 상사가 대한적십자 회장이 아닌 이상 허락해 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작 지들은 새 아파트 청약을 명분 삼아 업무시간 중 수시로 아파트 견본 주택 침대에 누워 보고 오고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라며 주문을 외우고 다녔다. 


 시간은 흘러 첫 헌혈 이후 32년이 지났다. 적십자 버스가 들어오는 날에는 오롯이 내 선택으로 팔뚝을 내밀 수 있을 만큼 직장 능구렁이가 됐다. 헌혈로 봉사활동 시간을 채운 경험이 있는 딸에게 언제 어디서 헌혈을 했는지 알 수 있고, 헌혈 가능일, 피검사 결과까지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레드커넥트' 앱을 소개받았다. 매번 헌혈 버스 신세를 지다가 시내 중심에 있는 헌혈의 집을 예약하고 찾게 됐는데 2030 시절 역전 헌혈 버스에 비하면 호텔 로비쯤 돼 보였다. 특히 내 눈을 번쩍 뜨게 한 것은 헌혈 횟수에 따라 제공하는 적십자 헌혈 유공훈장 제도였다. 누적 헌혈 횟수에 따라 30회 은장, 50회 금장, 100회 명예장, 200회 명예 대장, 300회 최고명예 대장을 수여한다는 게시물을 한자도 빠짐없이 읽었다.


 '아~ 이런 계속 팔을 걷었어야 했는데….' 

레드커넥트 앱을 살펴보니 내 헌혈 횟수는 26회로 기록돼 있었다.

 ‘그래 적어도 은장은 받을 수 있겠구나 해볼 만하다!' 

27번째 헌혈을 위해 다시 팔을 내밀었다. 

"선생님! 27번째 헌혈이십니다.” 

칭찬하는 간호사의 목소리도 잠시, 바로 옆 사람은 71번째 헌혈이라는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역사적인 2022년 3월 1일! 나는 서른 번째 헌혈을 마쳤다. ‘드디어 유공은장을 받는구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헌혈 유공패 디자인 공모전에서 선정된 새로운 유공패를 제작하고 있는 까닭에 시간이 걸린다는 안내문과 영화관람권, 햄버거, 이온음료, 방향제, 종이포상증, 고급수건과 유공패 제작이 완료되는 대로 집으로 보내준다는 약속까지 듬뿍 안겨주셨다. 특히 이날이 삼일절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살짝 뜨거워진 느낌까지 나름 벅차오르는 감동을 만끽했던 날이다. 


 2022년 4월 30일 마침내 헌혈 은장 유공패가 도착했다. 아름다운 패를 이리 보고 저리 살폈다. 기존 유공장보다 세련된 디자인, 묵직한 무게감에 감탄했다. 그리고 ‘앞으로 20회 묻고 금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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