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새벽 일출산행을 시작하게 된 이유

정상에서 밑바닥으로 하산의 맛!

by 배바꿈

언제부터였을까, 일요일 아침이면 아내와 함께 산을 오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주로 관악산을 찾았고, 자연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진 우리는 '대한민국 100대 명산'을 탐방해 보기로 의기투합했다. 때는 온 세상이 코로나의 공포에 휩싸여 있던 시절이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죄인처럼 여겨지던 분위기는 산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스크를 쓰고 산에 올랐다가 가쁜 숨을 감당하지 못해 혼쭐이 났을 때, 마스크가 내 생명을 지켜주는 것인지, 죽이려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더군다나 피톤치드 가득한 숲 속에서 마스크 속 고약한 입 냄새를 맡아야 하다니' 이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날 이후, 우리는 산행 시간을 인적이 드문 새벽으로 옮기는 선택을 했다. 포근한 이불의 유혹을 뿌리치고 맞이한 고요한 새벽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산속에서 답답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상쾌한 숲 속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동트기 전 산행의 매력을 맛본 우리는 매주 일요일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배낭을 꾸렸다. 배당 속에는 삶은 계란, 물, 얼린 복숭아통조림(여름용), 발열라면(겨울, 봄, 가을용), 초코파이, 떡, 오이, 과일 등 산꼭대기에서 즐기는 풍성한 아침 식단이 차곡차곡 담겼다.


일출 산행과 산꼭대기 조식을 즐기게 된 시점은, 오랫동안 나를 대변했던 '명함'을 내려놓고 내 안의 '나'를 찾아 나서려던 시기와 일치한다. 에누리 없이 딱 '중년', 그동안 쌓아 올린 보상과도 같은 자리에서 내려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생 두 번째 기적을 위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겠다고 각오를 다졌지만, 마음은 늘 복잡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새벽, 조용한 산길을 걷는 동안 머릿속에서 신호등이 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산은 세상살이의 보편적인 방향을 다르게 알려주면서 싱숭생숭했던 내 마음을 깨끗이 정리해 주었다.


물론 산에 오르는 것은 사회생활과 닮아 있다. 힘들고 지치고 다리가 아파도 정상을 향해 앞만 보고 오르는 세상살이와 비슷하다. 정상에 올라 여유롭게 인증 사진을 남기려면 다른 이들보다 서둘러야 한다. 운이 좋다면 눈부신 일출을 마주할 수도 있고,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운해의 장관을 감상할 수도 있다. 정상에서 맛보는 음식은 세상 그 어떤 고급요리보다 맛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잠시, 산에서는 스스로 내려와야 한다. 그래야 뒤따라 올라오는 사람들이 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산이 전해주는 세상살이와 다른 점이다.


내려가야 한다고 해서 걱정할 건 하나도 없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내리막이 곧 실패와 좌절을 의미하지만, 산에서는 올라왔던 만큼 그대로 내려가 바닥을 밞아야 비로소 편안함에 이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산이 주는 아름다운 풍광을 온전히 감상하고 음미하는 시간은 내려올 때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밑바닥으로 내리막을 가고 있어도 오히려 정상을 향해 치닫는 사람들이 부러운 마음을 전한다. “어머, 벌써 내려오시네요”, “와, 몇 시에 올라가신 거예요? 대단하세요",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혹시 중간에 화장실은 있나요?” (내려갈 때는 그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살짝 미소만 지어주면 된다. 개인적으로 “얼마 안 남았어요!”와 같은 섣부른 격려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누군가는 '올라갔다가 금방 내려올 것을 왜 힘들게 올라가느냐'라고 묻지만, 정상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과 잘 내려왔을 때의 편안함은 다녀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다.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나에게, 잘 내려왔을 때 편안함은 새벽산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경솔하고 어리석었던 나조차 오로지 정상에 서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렸던 적이 있다. 지금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갈 때의 묘미를 더 즐긴다. 고요한 산길을 걸으며, 평소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깨달음들이 퍼즐조각처럼 맞춰지는 경험을 한다. 치열한 속세에서는 내리막이 곧 몰락을 의미하지만, 산에서는 바닥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편안함에 이를 수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 이것이 바로 매주 일요일 새벽, 등산화 끈을 조여 매는 이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