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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눈망울에 녹다운

내 몸에 선(善)만 남고 악(惡)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한

by 배바꿈

동트기 무섭게 집을 나섰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귀가하는 일상을 살았을 때는 아이들과 마주쳐도 무심히 지나가기 바빴다. 한 살 한 살 떡국을 먹을수록, 내 몸 어딘가에 묻혀있던 '동심'이 다시 싹을 틔우는지, 아이들만 보면 얼굴에 비소가 번지는 증상이 잦아졌다. 직장에서는 나를 포함하여 겉과 속이 다른, 각양각색의 가면(페르소나)을 쓴 인간들 투성이었기에 천진한 동심을 가진 아이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천사의 미소 그 차체였다.


내가 사는 곳 주변에는 유아 돌봄 센터부터 육아지원센터, 병설유치원, 초등학교까지 아이들을 위한 시설들이 모여있다. 아이 키우는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쉬게 되면 '이제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겠구나' 기대를 품었다.


여유로운 아침시간, 산책길에 나섰다가 한 팔에는 여자아이를 안고 다른 손에는 초록색 어린이집 가방을 든 이웃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영락없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그는 아이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 입구 쪽을 바라보았고, 아이는 그의 품에 안겨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쪽에 서있던 나는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내 몸에 선(善)만 남고 악(惡)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한 전율이 일었다. 입에서는 '아~ 너무 이쁘다'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아이가 수줍은 듯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쓸 적 나를 쳐다보는데, 아이의 맑은 눈망울에 내 넋은 그대로 녹다운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가는 아이들을 엘리베이터에서 보는 것 외에는 마을에서 동심과 마주하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아이들이 뛰놀 거라고 기대했던 공원에는 기운 넘치고 기세 당당한 반려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라고 해야 할까. 반려견이 많아지고 아이들은 보기 어려워지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동심' 대신 사람처럼 재롱부리는 반려견들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아지가 다 이쁘고 귀여운 것만은 아니다. 모든 견주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몰상식한 견주에게는 불편한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달리기 하다가 낙엽으로 덮여 있던 배설물을 밟고 넘어질 뻔한 적도 있고, 엘리베이터에서 견주 뒤에 있던 녀석이 내 다리를 물것처럼 달려들어 놀란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괴롭고 불편했던지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린 만큼 '낑낑' '캥캥' '컹컹' 짖는 소리에 관리 사무실에 도움을 요청한 일 도 있었다. 확인해 보니 집에는 사람이 없고 괴로워하는 강아지만 울고 있어서 주인에게 연락 중이라고 했다.


사실 나 역시 강아지와 함께 할 자격은 없는 사람이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 입양했던 녀석이 있었는데. 아토피 증세가 있던 막내에게 좋지 않다는 판단으로 파양 보냈던 과거가 있어서다. 벌겋게 올라오는 막내의 얼굴은 새집증후군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섣부른 판단을 내린 나 자신을 질책했었다. 그런 내가 이웃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가족도 준비가 되면 다시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강아지 예절을 타인의 시선에서 배우고 있다는 생각으로 일부 무례한 반려 견주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고이 접어 감정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누군가를 미워해야 할 시간에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기에도 인생은 부족한 시간임을 깨닫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는, 아이들의 웃음과 반려견들의 재롱 속에서 잃어버린 동심의 조각들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잊고 살았던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순수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받은 것일지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과 천진한 웃음은 그 어떤 풍경보다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마을에 작은 천사들이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나 역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사랑스러운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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