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더할 나위 없는 지경까지 도달시키고자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코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을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자본과 맞바꾸며 살아간다.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사람이 부러운 이유는 돈, 큰집, 빠른 차 보다 본인 의지로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오롯한 내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은 나로서 나다운 인생을 더 사는 것이고, 바로 이런 삶이 수명을 더 늘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생각이다.
나 또한 그 원동력을 맛보기 위해 큰돈(내연봉)으로 시간을 구입했다. 세 아이 밥 굶기지 않고 아내의 생일과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근사하게 챙길 수 있었던 만큼 나에게는 적잖은 돈이었다. 여섯 군데 직장에서 30년 금융치료를 받아온 내역이 건강보험가입내역서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중 여섯 번째 직장에서 가장 긴 치료를 받았다. 내가 모을 수 있는 에너지를 모조리 끌어보아 그곳에서 후회 없이 쏟아내고. 19년간 받아온 금융치료를 중단했다.
친구들과 내 주변 동료, 선배에게 내 인생 두 번째 기적을 위한 나의 꿈을 얘기하면
'와! 이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거야?'라는 응원보다
'애가 셋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에휴 남일 같지 않다.'
'와이프가 그렇게 하래?' 라며
내가 아닌 아이들과 아내 걱정을 해주는 이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가족 뒷바라지도 못하는 부족한 아빠가 될까 봐 나도 걱정이 많았는데 커다란 행운이 따라주었다. 큰딸은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회사에서 인턴쉽 제안을 받았고,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졸업도 하기 전 정직원이 됐다. 둘째 아들은 대학에 다니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고 입대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학생 막내가 탁월한 질풍노도 근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두 명의 사춘기를 겪어낸 우리 아닌가, 예측 가능한 수준에서 '요즘아이들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사춘기 증상 정도만 받아들이면 버틸 수 있겠구나' 하며 희망을 이어갔다.
약 30년 만에 맛보는 소중한 시간, 1분 1초 꾹꾹 눌러 아껴 쓰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우선 아침시간을 누렸다. 오전 5시~9시 출근과 업무준비로 눈 깜짝할 새 흘려보냈던 4시간을 운동과 아침식사 그리고 커피 향을 맡으며 나에게 찾아온 기적을 여유 있게 즐겼다. 하지만 빠르게 흐르는 시간은 자유인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시간을 슬로비디오처럼 쓰면서 만끽하고 싶은 희망은 며칠 도 못 가서 주저앉았다. 반백년을 넘어 살아온 날 보다 살날이 더 짧아진 지금, '시간의 멱살을 붙잡고 시비를 걸어본들 별다른 수가 있을까' 하고 도리를 깨닫고 있을 무렵 아들도 노심초사 군입대일이 너무 빠르게 다가온다며 하루빨리 모병제가 돼야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아들이 신병교육대로 입대하는 날이 왔다. 전날, 아내가 직접 아들의 머리를 잘랐다. 나에게도 이발기를 주며 밀어보라고 했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증상 때문에 뒤돌아 섰다. 어릴 적 아랫입술을 늘 빨 아물던 녀석, 장난감 자동차 바퀴 도는 모습이 좋다며 한쪽볼을 거실바닥에 대고 차를 굴려대는 바람에 볼에 먼지가 가득했던 꼬마가 벌써 입대라니! 대견함과 걱정스러운 감정이 교차됐다. 신병교육대 연병장에 마련된 좌석에서 한참을 넋 놓고 있던 아들이 집합 호각 소리를 듣고 갑자기 눈물을 보였다. 아내도 나도 녀석을 감싸 안고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때는 고 채상병 사건으로 군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던 까닭에 그저 복무기간 동안 사고 없이 건강하게 전역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내가 아는 모든 신에게 기도했다.
늘 빠르게 지나는 시간을 야속하게 생각했다. 남은 내 시간을 꾹꾹 밞아 아껴 쓰기 위해 직장에서 발을 빼고 내 시간을 마련한 지 13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군대 좋아졌다고 하지만 18개월, 젊디 젊은 청춘을 내어주는 일은 쉽지 않을 터. 입대를 앞둔 녀석의 잿빛얼굴과 삭발하던 날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부모라는 이름은 정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타이틀이지 싶다. 진자리 마른자리는 기본, 사춘기를 눈 딱 감고 참아내면. 모두가 숨죽이는 수능이 기다리고, 자식 군복부 기간 동안 김정은의 심리상태까지 살펴야 한다. 그 무렵 우리에겐 갱년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면서 잦은 불면증과 어깨통증이 시작된다. 지금 난 딱 여기까지 와있다.
'난 부모 자격을 갖추고 있는 걸까?'
'그래 내가 놓아주마!'
큰 마음먹고 시간을 구입한 까닭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24시간을 48시간처럼 만들려고 했는데 바로 잡는다. '세월아! 지금부터 딱 18개월만 쏜살같이 지나가 주렴' 나는 빨리 가는 시간을 용서하기로 했다.
아들이 건강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전역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아빠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