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직장인의 삶의 전환점
나는 큰돈(연봉)으로 자유가 포함된 풀옵션 시간을 샀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내 시간을 어딘가에 내어주는 삶을 살다가 삼십여 년 만에 쉼표를 찍으면서 하루가 내 의지로 채워지는 순간들을 맛보고 있다. 일요일 저녁마다 올라가던 심박수가 낮아졌고, 월요일 아침이 이토록 여유롭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봉을 몽땅 갈아 넣어 구입한 시간인 만큼, 1분 1초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휴식을 시작한 지 한 달 즈음, 아들이 군대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부터 제대 날짜를 세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녀석을 보며, 시간이란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에겐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 나에겐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버리니 말이다. 입대한 아들이 보낸 훈련소 소포를 받던 날, 나는 특별한 결심을 했다. 딱 18개월만큼은 빨리 가는 시간을 미워하지 않기로.
봄부터 시작된 나의 '시간 사용기'는 새로운 경험으로 채워졌다. 입영을 앞둔 아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계획한 상하이 여행을 여행사 직원이 된 듯 열정적으로 준비했다. 가족을 벽에 세워놓고 증명사진 앱으로 사진을 찍은 다음 편의점에서 인쇄하고, 복잡한 비자 신청 절차(중국무비자 입국 시행 전)를 스스로 해냈다. 대행사에 맡겼다면 비자 신청에 필요한 세세한 개인정보를 넘겨야 했겠지만, 넉넉한 시간 덕분에 가족의 소중한 정보를 지키면서 비용까지 절약할 수 있었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다낭으로 떠났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농사일에 매진하시는 두 분을 위해 내가 직접 가이드로 나섰다. 패키지여행에서 겪으셨던 빡빡한 일정과 강제 쇼핑의 불편함 대신, 여유로운 일정으로 진정한 휴식을 드릴 수 있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다니"라며 고마워하시는 부모님 말씀에 택시 안에서 눈물이 날 뻔했다. 장인어른은 호이안 소원배에서 찍은 사진을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간직하고 계신다. 여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으신 장모님은 "그때 여행 다녀오길 잘했다"라고 하시지만, 나는 오히려 건강해진 다리로 함께할 다음 여행을 기대하고 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첫째 딸이 회사 워케이션(일과휴가를 동시에 즐기는 근무) 추첨에 당첨되어 푸꾸옥으로 함께 떠났다. 요즘 청춘들은 워케이션을 친구와 함께 간다는데, 우리 집 착한 딸은 부모를 선택했다. 리조트에서 보내는 시간은 황홀했지만, 딸아이는 하루 8시간을 노트북에 매달려야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쉼표를 찍으면서 가장 큰 변화는 시간을 대하는 인식이다. 직장인들이 월요병과 싸우며 영양제로 무장할 시간, 나는 편안한 운동복 차림으로 지역 스포츠센터로 향했다. 오전 5시 40분, 이른 시간임에도 센터는 부지런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 손에 수영가방, 다른 손에 정장을 든 이들을 보며 깨달았다. '직장을 핑계 삼아 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구나!'
이제 내 머릿속에는 넷플릭스 드라마'삼채'에서 뭔가 잘못하면 들리는 외계인의 속삭임과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해야 하는데", "하기로 했잖아", "이제 그만", 새벽 5시부터 아침 9시 사이에 그 목소리는 더욱 강해진다. "일어나야 해", "양치하고 따뜻한 물을 마셔", "스트레칭하기로 했잖아!", "이제 운동화를 신어야 해", "아니야, 스쾃 와 푸시업 먼저". 이 자성의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하루가 알차고 삶이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덧 겨울이 찾아왔고, 1년이라는 시간의 끝자락이 보인다. 시간을 샀다고 해서 모든 날이 의미 있게 채워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하루 종일 넷플릭스 앞에 누워 있기도 했고, 카페에서 몇 시간을 멍하니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조차 내가 선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강제된 무기력이 아닌, 자발적인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출근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우리 동네의 일상도 새롭게 다가왔다. 아침은 활기가 넘쳤고, 오후의 공원은 한가로웠다. 주말만 되면 북적이던 곳들이 평일에는 이토록 여유롭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책을 읽는 방식도 달라졌다. 출퇴근길에 짬짬이 읽던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한 권의 책을 며칠에 걸쳐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다. 좋은 구절을 만나면 멈춰 서서 생각을 정리하고, 때로는 필사를 하며 글귀를 되새겼다.
돈을 버는 대신 시간을 산다는 것은, 나에게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들은 내게 새로운 관점을 선물했다. 시간은 돈보다 더 소중할 수 있다는 것,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내 선택을 지지해 준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빠 피부가 너무 좋아졌어, 보기 좋아"라는 그녀의 말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퇴근 후 지친 모습으로 소파에 파묻혀있던 예전의 내가 아닌,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와 설거지를 함께하며 집 청소를 즐기는 남편이 되어 있었다.
물론 이따금 불안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사업을 시작해도 괜찮을까? 경력의 공백기를 어떻게 설명할까?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 현재를 즐기자' 미래에 대한 걱정이 현재의 행복을 망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산다는 것은, 결국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일이었다. 타인의 시간표가 아닌, 내 의지대로 하루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휴식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진정한 부자는 돈이 아닌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비록 통장 잔고는 줄었지만, 내 마음의 통장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해졌으니까.
앞으로 직장이든 내 사업이든, 이 시간 동안 배운 교훈을 잊지 않으려 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나만의 시간을 만들고, 그 시간을 의미 있게 채우며 때로는 멈춰 서서 깊게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을. 연봉과 맞바꾼 이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나는 안다. 나와 아내에게 약속한 1년을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 머릿속 자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남은 시간도 의미 있게 채워나가려 한다. 시간을 산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닌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쓰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