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 나는 에르메쉬

3천 원 럭셔리의 재래시장 런웨이

by 배바꿈

"Bonjour, Mademoiselle."

오늘도 나의 뮤즈, '이 주부'가 현관문고리에 걸린 나를 낚아챈다. 카드 명세서의 충격으로 '이 과장'에서 '주부 9단'으로 각성한 사내. 오늘 우리의 런웨이는 매끈한 대형 마트가 아니다. 생선 비린내와 참기름의 고소함이 진동하는 날것의 무대, 재래시장이다.


내 몸값은 시장 입구 만물상에서 치른 단돈 3,000원. 나의 진정한 가치는 이깟 얄팍한 지폐 석 장으로 매길 수 없다. 세상은 나를 '시장바구니'라 부르지만, 내 정식 명칭은 '더 그린 메쉬 3000(The Green Mesh 3000)'. 보라, 군더더기 없는 '시그니처 그린' 컬러와 공기 저항을 최소화한 촘촘한 직조 패턴. 에르메스가 평생 넘보지 못할 아방가르드 스트리트 룩의 정수다.


이 주부의 거침없는 워킹이 시작된다. 이것은 단순한 장보기가 아닌 치열한 '라이프스타일 큐레이팅'이다. 두부 가게 앞, 카드 단말기 대신 그의 두툼한 지갑에서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가 튀어나온다. 할부의 늪에 빠트리던 신용카드는 철저히 봉인했다. 오직 군더더기 없는 현금 박치기. 상인이 검은 비닐에 담아 건네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가닉 화이트 큐브(손두부)'와 대지의 흙기운을 그대로 머금은 '롱 그린 허브(흙대파)'가 내 넉넉한 품으로 들어온다.


얼음물에 담겨 있던 생고등어의 쿨하고 축축한 텍스처가 옆구리에 닿는다. 가죽 가방 따위는 감히 비할 바가 못 된다. 그것들은 시장 바닥 물기 한 방울에도 사색이 되지 않나. 고작 립스틱과 파우치나 품는 그 얄팍한 그릇과, 생명의 식량을 잉태하는 나의 태생적 궤적은 처음부터 달랐다.


야채가게 앞, 드디어 운명적인 라이벌을 조우했다. 질척이는 바닥을 피해 까치발을 든 채, 진짜 '샤넬 백'을 가슴팍에 품고 쩔쩔매는 여자. 그 품에 안긴 샤넬 백이 흙대파를 꽂은 나의 아찔한 '바디감'을 힐끔거린다. 뭘 그렇게 보시나. 여기는 뭣하러 행차하셨나.


솔직히 그 좁아터진 속에 시장 인심이 얹어준 '덤' 하나라도 품을 수 있나. 무심하게 던져주는 흙 묻은 무 한 개라도 감당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수박에 배추 한 포기까지 너끈히 삼켜내는 '맥시멀리즘'의 화신이다. 찢어지지도, 젖지도 않는 최첨단 '폴리프로필렌' 소재의 위엄. 고작 생선 튄 물이 무서워 주인의 품으로 숨어들어야 하는 온실 속 화초들과는 생존력부터 다르다.


야채가게를 지나 시장 안쪽으로 접어드는 길목, 갑자기 인파가 술렁인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고, 마이크 봉이 숲처럼 돋아난다. 양복 차림의 사내들이 호떡집 앞에 진을 치고, 그 한가운데 반짝반짝 광이 나는 얼굴 하나가 호떡을 집어 든다. 어묵 국물 한 모금에 "역시 시장 인심이 최고야!"를 연발하는 그 능숙한 표정 연기. 호떡은 뜨거운 채로 카메라 앞에 놓이고, 어묵은 국물도 채 식기 전에 마이크 세례를 받는다.


이 주부가 무심하게 그 옆을 스친다. 오늘 그의 마지막 미션은 '퍼멘티드 소이빈 페이스트(청국장)' 한 봉을 확보하는 것이다. 보글보글 끓여낼 뚝배기를 상상하며 그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미 내 품에는 오가닉 화이트 큐브(손두부), 롱 그린 허브(흙대파), 그리고 방금 추가된 '그린 벨벳 슬라이스(애호박)'까지, 오늘의 청국장 라인업이 완벽하게 갖춰졌다.


이 주부의 거친 손아귀가 묵직해진 나를 쥐고 집으로 향한다. 하중이 손잡이를 파고들어도 나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빚 없이 차려낼 가장의 밥상 무게만큼이나 나는 질긴 녀석이니까. 콧대 높게 세상의 모든 명품을 향해 당당히 외친다.


쳐다보지 마라. 근사한 로고 하나 없다고 함부로 재단하지 마라. 내 안에는 할부의 이자율 따위가 섞이지 않은, 오롯이 정직한 현금으로 빚어낸 따끈한 '뚝배기 거리'가 들어있다. 이것이 삶을 지탱하는 진정한 럭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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