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을 땐 도파민, 갚을 땐 아드레날린

지갑 속 이중인격자

by 배바꿈

가로 85.6mm, 세로 53.98mm, 두께 0.76mm. 나는 당신의 지갑 속에서 가장 얇지만, 가장 무거운 존재다. 이 작은 플라스틱 조각 안에 찰나의 욕망과 부질없는 허세, 조만간 쏟아낼 '피눈물'이 빼곡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결혼 20주년 기념일, 백화점 명품관 앞에 멈춰 선 이 과장의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가격표 앞에서 주춤하는 그의 귓가에 나는 은밀히 속삭인다.

"야, 쫄지 마. 너에겐 '무이자 6개월'이라는 치트키가 있잖아. 어차피 미래의 네가 갚을 건데, 오늘의 네가 왜 걱정해?"


떨리는 손이 나를 점원에게 건넨다. 단말기에 내 몸을 꽂는 순간, "띠링-" 경쾌한 신호음과 함께 뇌 속 도파민이 폭발한다. 방금까지 쭈뼛거리던 이 과장은 온데간데없다. 세상을 다 가진 재벌 3세처럼 어깨를 펴고 쇼핑백을 받아 든다. 현금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오직 나만이 줄 수 있는 '자본주의적 뽕'이다.


나의 진짜 얼굴은 매월 25일, 월급날에 독버섯처럼 드러난다. 띠링. [카드 대금 결제일 안내: 2,580,000원]

액정을 확인하는 이 과장의 얼굴이 사색되면서, 스마트폰을 쥔 손이 볼품없이 떨린다.


'어이, 이 과장. 왜 그렇게 놀라? 다 네가 긁은 거잖아.'

'이건 나를 위한 투자'라며 지른 뒤 빨래 건조대로 전락한 운동기구, '오늘 내가 쏜다'며 호기롭게 긁어대던 술자리. 그날 유독 닳아버린 구두 뒷굽을 보며 '옳거니, 내일은 구두 매장으로 전선을 이동해야겠군' 했었다.


결제일이 다가오면 나는 상냥한 친구에서 냉혹한 추심업자로 돌변한다. 통장 잔고가 순식간에 텅~장으로 증발하는 '월급 로그아웃'의 순간, 나는 비릿한 웃음을 흘린다. 편의점 맥주 두 캔과 삼각김밥 앞에서 단말기가 '한도 초과'를 뱉어낼 때, 당신의 비루한 주머니 사정을 온 천하에 까발리는 것 같아 나도, 살짝은, 미안하다.

지갑 속 아래 칸 체크카드 녀석이 냉소적인 눈빛을 보낸다.

"쯧쯧, 주제를 알아야지. 나는 잔고가 없으면 긁히지 않거든. 너처럼 미래를 팔아넘기진 않아."

"시끄러워, 넌 현재만 알지, 나는 시간을 융통할 수 있단 말이야. 너는 인간의 찬란한 허세를 절대 이해 못 해"


오늘도 이 과장은 카드값을 메꾸려 '리볼빙'이라는 악마를 검색한다.

'후훗 그래, 그렇게 또 빚을 빚으로 돌려 막는 거지. 나는 그 끝없는 구멍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억해라. 나는 충실한 하인인 척하지만, 사실은 당신의 미래를 저당 잡은 주인이라는 것을. 나를 꺼낼 땐 부디 신중하기를. 긁을 때 도파민은 6초면 끝나지만, 갚아야 때 아드레날은 6개월 동안 당신을 옥죄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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