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택뒤에 숨긴 구두의 속사정

265mm 가장의 무게를 견뎌내고...

by 배바꿈

매일 아침, 나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각오로 현관 앞에 도열한다. 어김없는 시간에 나의 주인, 이 과장이 육중한 한숨과 함께 구둣주걱을 밀어 넣는다.

"끄응- 쑥!"


도킹(Docking)의 순간이다. 숭숭 뚫린 메쉬 구멍으로 숨이라도 쉬는 운동화나 사무실 의자 녀석들과 달리, 천연 가죽인 나는 태생부터가 '밀실'이다. 그의 발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그만의 '숙성된 향기'를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이것은 발 냄새가 아니다. 어제 마신 소주의 잔해, 부장님께 깨질 때 흘린 식은땀, 거래처에 굽신거리며 생성된 암모니아가 뒤섞인 치열한 '생존의 진액'이다. 나는 이 독가스를 품은 채, 비슷한 냄새를 공유하는 전철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오후 3시, 전쟁이 절정에 달하는 시간. 이 과장은 이미 거래처 세 군데를 훑었다. 그의 발은 아침보다 1.5배는 비대해졌다. 이스트를 잔뜩 넣은 밀가루 반죽처럼 퉁퉁 부어오른 발. 나의 소가죽 피부가 비명을 지른다.


'주인 양반, 발가락에 힘 좀 빼! 나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정녕 박음질 뜯어지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아우성쳐도 그는 들은 척도 안 한다. 오히려 운동이랍시고 꽉 끼는 나를 신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내리며 헉헉댈 뿐이다. 나를 조여 오는 그 압박감이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인 것만 같아, 차마 더 세게 조이지 못하고 슬그머니 가죽을 늘려 이 과장의 피로가 비집고 들어올 공간을 내어준다.


그런 나에게도 '리스펙트' 받는 순간이 온다. 평소 현관 구석에 나를 처박아두던 그가, 일요일 오후, 돌연 신문지를 깔고 앉아 구두약 뚜껑을 연다. 솔질과 약칠, 헝겊으로 나를 문지른다. 군대 실력 다 죽었다며 투덜거리면서도, 투박한 손놀림이 제법 정성스럽다.

"허허 그래도 반질반질하네."

거울처럼 매끄러워진 내 앞코에 얼굴을 비춰보며 그가 흐뭇하게 웃는다.


'야, 이 과장. 솔직히 말해봐. 내가 깔끔해져서 웃는 거 아니지? 월요일, 또 전장으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는, 비장한 자기만족이지. 그래도 좋다. 네가 웃으니 나도 오랜만에 때 빼고 광낸 보람이 있으니까.'


찰나지만, 우리는 서로의 빛나는 모습을 마주하며 묵직한 전우애를 다진다. 하지만 이 광택은 나를 들어 올려 뒤집는 순간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나를 뒤집어 보라. 화려한 앞모습에 가려진, 처참한 나의 뒷굽이 속사정을 드러낸다.


바깥쪽만 비스듬히, 흉하게 닳아버린 밑창. 얼마나 비틀대며 버텨왔는지 출퇴근길 아스팔트는 다 알고 있다. '또각, 찌익' 내 뒷굽이 지면에 내지르는 소리는 그가 감당하는 무게를 가장 정직하게 증언한다.


밤 11시, 이 과장이 현관에 나를 벗어던진다. 비로소 해방이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미미한 바람에 지독한 하루의 냄새를 날려 보낸다. 가끔은 억울하다. 신발장에 모셔진, 일 년에 한 번 신을까 말까 한 '결혼식 참석용 에나멜 구두'는 여전히 새것처럼 반짝인다. 젠장. 닳지 않은 것들은 언제나 빛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퉁퉁 붓고 냄새나는 그 발을 가장 잘 아는 것도, 묵묵히 받쳐줄 수 있는 것도 나뿐인 것을. 내일 아침, 차가운 구둣주걱이 내 목덜미를 파고들 때 우리는 다시 한 몸이 된다. 나의 뒷굽은 조금 더 닳아 없어질 것이다. 바깥쪽으로, 비스듬히. 그것이 이 과장이 세상을 향해 걷는 방식이고, 나는 그의 삶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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