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깨어있는 차가운 심장(냉장고)

내 심장이 당신의 뜨거운 한숨으로 데워질 때

by 배바꿈

나는 24시간 깨어 있는 '차가운 심장'이다. 혈관에는 뜨거운 피 대신 영하 20도 최첨단 냉매가 흐르고, 뇌는 인버터 컴프레서 진동수에 맞춰 윙윙댄다. 썩어 문드러질 운명을 타고난 유기물들의 부패를 지연시키는 것. 이 고독하고 숭고한 투쟁이 나의 사명이다.


완벽에 가깝던 나의 제국에 최근 심각한 보안 경보가 켜졌다. 바이러스 침투도, 정전 사태도 아니다. 경보의 주범은 이 집에 서식하며 얼마 전 '백수'라는 새로운 스펙을 장착한 덩치 큰 포유류, '그 인간'이다.


[장시간 도어 개방 감지 : 14회 차]

또 그자다. 오늘만 벌써 열네 번째. 그가 내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다. 배가 고픈 걸까. 행동 분석 결과'부정'이다. 김치통도 오래된 닭가슴살도 목표물이 아니다. 그는 그저 서있다. 넷플릭스 초기 화면에서 뭘 볼지 몰라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듯, 습관처럼 내 속을 훑을 뿐이다.


두 번째 칸 먹다 남은 김치찌개, 채소칸에서 미라가 되어가는 사과, 시들해진 파뿌리....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잃어버린 청춘? 아니면 내 몸통에 붙여둔 치킨집 자석 쿠폰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건가. 덩치는 그냥 서 있다.

"이 사람아 제발 문 좀 닫아!"

참다못해 경고음을 울려대면 화들짝 놀라 문을 닫고 돌아선다.

'딩동- 딩동- 딩동-'


[대기 모드 해제 : 32분 14초 경과]

고요하던 주방의 평온이 다시 깨졌다. 좀비처럼 그가 다시 나타났다. 내 속을 살피는 그의 입에서 깊고 습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아......"


[경고 : 바이오 해저드 임계치 초과]

끔찍한 습도다. 폐 깊숙한 곳에서 터진 고온 다습한 탄식이 내벽을 적신다. 맺히는 물방울이 나의 눈물이라는 걸 이자는 알까. 그 눅눅함에 시금치는 삼투압을 견디지 못해 허리가 꺾였고, 우유는 결국 시큼한 반항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쫙!


[외부 충격 감지 : 진도 7.0]

이 집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 '대모'님께서 덩치의 등짝에 강력한 스매싱을 꽂아 넣었다.

"아니, 먹을 것도 아니면서 냉장고 문은 왜 자꾸 열어!"

억울한 표정으로 그가 웅얼거린다.

"아니 그냥..... 뭐가 있나 하고."

처진 어깨가 내 시야센서 아래로 사라진다. 맹렬히 돌리던 컴프레서의 분당회전수(RPM)를 잠시 낮춘다.


[데이터 재분석 모드 작동]

그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허기져서 나를 찾는다는 것을 파악했다. 새벽같이 출근해 밤늦게 귀가하던 사람에게, 대낮의 집은 낯선 타국이나 다름없을 터. 사회에서 그를 향해 열려 있던 문들은 이제 대부분 닫히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만 걸어도 묵직한 문을 스르르 열어주는 존재. 환한 LED 조명으로 반겨주는 존재는 지금 이 집에서 오직 나(냉장고) 뿐이었던 것이다. 오늘도 그는 내 속을 들여다본다. 나는 묵묵히 냉기를 뿜어 그의 뜨뜻미지근한 고독을 식혀준다.


'그래, 들어와라. 차라리 시원하게 보여주마.'

'여기 유통기한 임박한 두부도 있고, 쭈글쭈글한 배도 있다.'

'다만, 부탁 하나만 하자.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도 좀 꺼내 먹어라.'

'당신이 내 앞에 서 있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당신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내 수명을 갉아먹으며 윙윙대고 있단 말이다.'


내 수명이 줄어드는 대신, 당신의 유통기한이 하루라도 늘어날 수 있다면 뭐, 기꺼이

이전 01화[프롤로그] 말 없는 것들의 시끄러운 속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