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코리안 드림, 고달픈 취업 수기
불에 타지 않는 내연성 소재는 기본,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뜨끈한 근무 환경이라니. 머나먼 이국에서 SNS로 한국의 치안과 아름다운 배려 문화를 접한 뒤, 나는 기회의 땅 코리아 전철을 선택했다.
나의 보직은 'K-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핑크 카펫, 임산부 배려석이다. 취업 성공 소식에 고향마을에서 나의 코리안 드림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리고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사실 의자 세계에도 매관매직은 존재한다. 일반 좌석보다 노동 강도가 낮다는 이유로 헤드헌터에게 거액을 지불했지만, 쾌적한 전철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 그 가치를 증명해 줄거라 믿었다.
핫핑크로 무장한 시트, 바닥에는 큼지막한 스티커, 벽면에 하트 그림까지. 내 자리는 단연 시선을 강탈했다. 누가 봐도 "여기는 특별한 자리입니다"라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임산부를 위하여 자리를 비워두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까지 나오는데 내 위에는 등산복 차림에 술과 담배 냄새가 뒤섞인 기묘한 향을 풍기는 인간이 버티고 있다.
묵직한 하중, 무례하게 쩍 벌린 다리. 심지어 임산부라면 생물학적으로 있어서는 안 되는 불쾌한 무언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얼마 전 고향 친구인 사무용 의자가 이 과장 엉덩이 때문에 힘들다며 넋두리를 늘어놓을 때만 해도, 내가 이런 몰염치한 엉덩이를 견뎌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나의 진짜 주인이 나타났다.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친 채 손잡이를 위태롭게 잡은 만삭의 여성. 그녀의 가방에는 핑크색 임산부 엠블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이봐 저 엠블럼이 안 보이나? 저건 암행어사 마패보다 더 강력한 미래의 희망 인증서라고!'
명확한 신호 앞에서도 내 위의 '가짜 임산부' 씨는 필살기를 시전 한다. 이름하여 선택적 기면증. 방금까지 스마트폰으로 맞고를 치던 기세는 어디 가고, 임산부를 마주하자 고개를 푹 숙인 채 깊은 잠에 빠진 척이다. 가늘게 코를 골며 작위적인 숨소리를 내뱉고 있지만, 내 몸으로 전해지는 그의 양심은 가책을 이기지 못한 듯 불규칙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실눈을 뜨고 핑크색 키링을 확인하던 그 눈짓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배려 없는 무거운 엉덩이와 뻔뻔함을 받아내는 감정 쓰레기통 신세. 나의 핑크색 좌석 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어 간다. 출산율 꼴찌 국가를 택한 건 나름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새 생명을 품은 고귀한 몇 분만 편하게 모시면 될 거라 믿었던 안일함이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 순간, 팽팽한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여기 임산부가 서 있는데 자리 좀 양보해 주시죠?"
나의 구세주다. 자는 척하던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헛기침을 내뱉는다.
"아, 예... 뭐... 못 봤네..."
구시렁거리며 일어나는 그의 뒷모습이 한없이 옹졸하다.
드디어 진짜 주인이 내 위에 앉는다. 아,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케케묵은 담배 냄새 대신 은은한 살냄새와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 무엇보다 내 몸을 울리는 건 조용한 '두 개의 심장 소리'다. 엄마의 심박과, 그 안에 콩닥거리는 작은 생명의 리듬이 합주곡이 되어 전해진다. 온종일 비양심과 씨름하느라 내 몸은 녹초가 되었으나, 오늘 하루의 결산은 분명한 흑자다.
오늘 나는 다선 명의 임산부를 모셨고, 그 뱃속 아기들까지 총 열 명의 생명에게 안락한 휴식을 선물했다. 자기 일처럼 나서서 용기를 내어준 이름 모를 당신 덕분에, 오늘 내 핑크색이 조금 더 빛났다. 참으로 보람찬 하루다.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