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권력(리모컨)의 끈적한 슬픔

은퇴한 남자의 마지막 옥새, 리모컨 일지

by 배바꿈

틈새마다 뀰껍질 즙과 스낵가루가 화석처럼 박혀있다. 칠흑 같은 블랙스킨에는 손때가 겹겹이 쌓여, 거실의 연대기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 집에서 나만큼 손 많이 타는 물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은퇴한 남자의 마지막 옥새' 리모컨이다.


나의 하루는 그의 기상과 함께 시작된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본능적으로 나를 찾는다. 손아귀 힘이 제법 세다. 사회에서 미처 휘두르지 못한 권력을 여기서 보상받으려는 듯, 나를 부서져라 꽉 쥔다. 굿모닝 인사도 없다. 그냥 쥔다.


"타닥, 타닥, 타 다다다닥!"

지옥의 탭댄스가 시작됐다. TV를 보는 게 아니라 '돌리는' 행위 자체에 중독된 것이다. 뉴스 3초(타닥), 홈쇼핑 2초(타닥), 유튜브 10초(타닥), 다시 뉴스. 목적지 없는 순환이다. 내 실리콘 버튼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의 뇌파는 불안정하고, 엄지손가락은 광기에 휩싸여 있다. 어쩌면 채널이 아니라 시간을 돌리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가 찾는 건 재미있는 방송이 아니다. 즉각 반응해 주는 대상이다. "채널 올려!" 하면 올라가고, "소리 죽여!" 하면 죽는 녀석. 자식도, 아내도 이제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 나만 그런다. 적외선 신호 하나면 군말 없이 복종한다. 냉장고도, 세탁기도, 전자레인지도, 체중계도 당해조지 못한 직책이다. 나는 그의 유일한 '자존감 생성기'. 이 집에서 가장 슬픈 타이틀이다.


잠시였다. 이 집의 진짜 실세가 기침(起寢)하셨다.

"아우, 정신 사나워! 그만 좀 돌리고 채널 고정해!"


그녀가 원하는 건 '채널 고정'이 아니다. '리모컨 이양'이다. 그것도 즉각적인.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한다. 레이저다. 움찔. 나를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찬다. 그는 못 본 척 시선을 TV에 고정한다. 긴장된 침묵. 누가 먼저 말을 꺼내느냐의 싸움이다.


뺏기지 않으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 말은 없지만 룰은 있다. 그 룰에서 내가 누구 손에 들려 있느냐가 오늘의 권력 지형을 결정한다. 그는 소심하게 볼륨을 내린다. 그 눈빛이 애처롭다. 결국 아내의 등쌀에 밀려 나를 허벅지 밑 깊숙이 은폐한다. 일종의 '인질극'이다. 꿉꿉하고 축축하다. 이 남자, 거실마저 막다른 길이다.


저녁 야구 중계가 시작됐다. 나는 이 시간이 제일 무섭다. 응원하던 팀이 역전 홈런을 맞는 순간

"에라이, 썩을 놈들!"

내 몸은 허공을 가르며 퍽. 소파 쿠션에 처박힌다. 억울하다.

'야구는 쟤네가 못했는데 왜 내가 날아다녀야 하나.' 그것보다 더 억울한 건, 이 남자가 응원하는 팀이 올 시즌 최하위 팀이라는 사실이다.


밤 11시. 불 꺼진 거실, TV 화면만 번득인다.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입을 벌린 채 잠들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나를 꽉 쥐고 있다. 마치 엄마 젖을 떼지 못한 아기처럼. 내가 없으면 이 거실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잠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주름진 미간, 축 처진 입꼬리. 나날이 느는 흰머리. 낮 동안 나를 괴롭히던 폭군은 온데간데없고, 갈 곳 잃은 중년 남자가 덩그러니 누워 있다.

사회에서 쥔 것 하나 없어도, 나 하나쯤은 마음대로 쥐어야 숨통이 트이는 사람. 오늘 밤은 그냥 잡혀 있어 주기로 했다.

단, 조건이 있다.

아저씨, 내일부터 손 씻고 만져요. 버튼 틈에 낀 멸치 똥 냄새 때문에 돌아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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