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을 거스르려는 당신에게
우주의 가장 위대한 법칙, 중력(重力)을 대변하는 성실한 가문에서 태어난 나는 질량을 가진 모든 존재가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숭고한 진리를 숫자로 번역하는 숙명을 지녔다. 잠을 줄이고 식사 시간에도 머뉴얼을 놓지않는 노력 끝에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품질 테스트를 통과했다.
정밀 센서와 강화유리로 무장하고 공장을 나설 때만 해도, 내 삶은 과학적이고 철학적일 줄 알았다. 진실을 마주하는 인간 곁에서 건강을 돕는 객관적 조언자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현실은 가혹했다.
아파트 욕실 앞 발매트 사이 비좁은 구석이 내게 허락된 영토다. 내가 마주한 인간은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아니다. 매일 밤 야식과 타협하고 매일 아침 현실을 부정하는 가련한 중생일 뿐이다. 그는 평소엔 나를 발가락 끝으로 툭툭 밀어 구석에 처박아 두다가, 샤워 직후에야 비로소 나를 찾는다.
나를 대할 때마다 치르는 비장한 의식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몸에 걸친 모든 문명의 허울을 벗어던진다. 속옷은 물론, 손목의 스마트워치와 얇은 안경마저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머리카락의 물기조차 허용치 않겠다는 듯, 머리를 털어낸다. 압권은 변기 위에서의 사투다. 장 속에 남은 일말의 미련까지 모조리 비워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눈물겹다.
마침내 뽀송하게 마른, 그러나 여전히 두툼한 발바닥이 내 차가운 강화유리 표면에 닿는다. 네 모서리의 초정밀 스트레인 게이지 센서를 타고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두 발이 온전히 내 영토 위로 올라서는 순간, 어김없이 기이한 행동이 시작된다.
"흡!"
두 뺨을 부풀리며 숨을 참는다. 허파에 공기가 들어가면 그 무게만큼 체중이 늘어날까 두려운 것일까. 가슴을 부풀려 흉강을 확장하면 부력으로 몸이 공기 중으로 떠오르리라 믿는 건가.
'이봐, 주인 양반. 숨을 참든 뱉든, 질량 보존 법칙은 유효하다네'
'어젯밤 게눈 감추듯 들이킨 캔맥주와 마늘 통닭의 영혼은 결코 증발하지 않는다 말일세.'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LED 숫자를 띄웠다.
[95.5kg]
숫자가 점등되는 순간, 욕실 공기가 얼어붙는다. 그의 동공이 진도 7 수준으로 격렬하게 흔들린다. 곧이어 인간 특유의 얄팍한 현실 부정이 시작된다. 그는 황급히 내 위에서 내려와, 제눈에 평평한 곳으로 보이는 바닥을 찾아 이리저리 나를 옮긴다.
"이거 수평이 안 맞았나? 바닥이 비스듬한가 보네."
"배터리가 다 돼서 센서가 미쳤나?"
이곳저곳 자리를 옮겨 보고, 수건으로 애꿎은 내 강화유리를 박박 닦아낸다. 바닥을 툭툭 두드리는 것도 모자라, 한 발만 살짝 올렸다가 빼는 '간 보기' 기술까지 시도하며 시스템 오류를 찾아내려 혈안이다.
"하아... 이게 고장 났나..."
'이봐 덩치 나는 멀쩡하다네 '
'배터리는 석 달 전 당신이 새로 갈아 끼웠고'
'내 센서는 지구 중력을 완벽하게 계산해 냈을 뿐이라네'
고장 난 건 내 초정밀 센서가 아니라, 그자의 기억력 보존 장치다. 불과 열두 시간 전, 회식 자리에서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거짓말을 호기롭게 외치며, 불판 위에 눌어붙은 삼겹살 볶음밥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던 경쾌한 숟가락질을 그가 기억해 내기를 바랐다.
나는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지구가 당신을 얼마나 묵직하게 사랑하고 끌어당기는지 숫자로 보여줄 뿐이다. 늘어난 숫자를 확인한 뒤 원수 보듯 나를 째려보는 눈빛은 부당하다. 통제력을 잃은 건 자신의 식욕이고,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고도 매번 불량품 취급을 받는 건 내 가여운 센서다.
한참을 서성이며 입술을 깨물던 그가, 욕실을 나선다. 잠시 후, 거실 너머에서 익숙하고도 절망적인 냉장고의 경고음이 들려온다.
띵동- 띵동- 띵동-.
문 닫은 지 얼마 지났다고, 내벽에 맺힌 냉장고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문을 다시 열어젖힌 것이다.
"아, 아침부터 스트레스받네. 당 떨어져. 뚱바(뚱뚱한 바나나맛 우유)를 어디에 뒀더라"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단것을 먹어야 한다는 치명적인 알고리즘은 내일 아침 그자의 숫자가 최고치로 갱신되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내가 띄운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엄지발가락으로 꼬집듯 내 모서리를 밟고 내려가지 마라. 까치발을 든다고 중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으며, 체중 분포만 불안정해져서 회로에 혼선만 줄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받아들여라. 당신의 묵직함은, 수많은 음식과 치열하게 싸우며 차곡차곡 축적해 온 훈장이자 전투력 아니겠는가.
내일 아침에는 숨을 편안하게 쉬면서 올라오길 바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몸무게 100그램 줄여보겠다고 숨을 꾹 참느라 벌름거리는 두 콧구멍이 우스꽝스럽고 애잔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