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벌새가 아니라 참새를 보았다

영화 벌새 & 시나리오집 벌새 리뷰

by 배고파

영화 벌새.


솔직히, 각설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왜 이렇게까지 극찬인지 모르겠다. 2시간 18분의 나름 긴 독립영화, 배급사와의 네고끝에 20분을 잘라낸 버전으로 개봉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단숨에 적어 내려간 것으로 보아 화제작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리뷰를 쓸 때 소재, 작가, 줄거리, 감상, 다른 비평 등 다양한 요소들을 담아내려고 굉장히 애쓰는데 이번만큼은 내 감정에만 몰입하여 손가락 가는 대로 적어보았다.



아이라는 화자를 통해 각박한 어른 세상을 무지함으로 경험하는 ‘평범한’ 이야기. 인스타 필름 카메라 필터 같은 아날로그적 감수성, 어여쁜 소녀에게 가해지는 마음의 상처와 어쩔 수 없는 비극적 나날들이라는 안타까워 미칠 것 같은 보호본능에 호소하는 장치, 보편성에 호소하는 듯 하지만 ‘벌새’만의 고유성도 욕심내는 시리즈에 대한 떡밥(리코터 시험이라는 영화 참고)쯤으로 치부한다면 내가 나쁜 사람인가?

1994년 일어난 한국사람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사회악과 사건사고들. 마음 시린 가혹한 남존여비 도시 중산층 가족 문화의 민낯... 글쎄, 사실 인간의 취향이라는 것이 천태만상 인간세상 가지가지인 만큼 다양한 것이 이치라지만 ‘그 시절 그 이야기’st 전형성을 가진 이 드라마에 왜 이렇게 전 세계 영화인들이 환호했을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쯤 개취인 영화를 발견한 이들은 완벽한 한 편의 수작이 탄생했다며 그 여운을 감미롭게 느끼고 있지만, 누군가는 욕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있다. 이것은 흔한 영화관 풍경이며, 영화 경험이다. 아직 벌새를 보기 전까지, 체감으로 느껴지는 ‘벌새’는 다수 영화제에서의 수상기록, 심심치 않게 보이는 SNS에서의 포스팅들 속에서 이미 독립영화의 방탄 같은 느낌이었다. 범세계적인 유니버설 한 가치를 노래해서 희망과 위로를 전하는 기능… 다만 독립영화라서, 진짜 작정하고 가지 않는 사람들만이 평가를 하는 구조 속에서 일관되게 아름다운 두터운 팬층이 두드러지지 않을까?라는 의문점이 나 같은 사람도 호기심에 (넷플릭스에 올라왔으니 내친김에) 시청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K-패밀리의 저녁 시간. 쎄하다.


피가 보이며 끝난 부부싸움이 보편적인 폭력성이 내재된 ‘보통의’ 가정 속 엄마, 성적과 명문대만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의 최상 계급인 공부 잘하는 오빠(가부장의 폭력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노동이 천대받고 그 마인드가 학급 교훈 액자에 전시되던 시대(노래방 가지 말고 서울대 간다).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사춘기 소녀들의 성장, 운동권 출신 학원 선생님과 굉장히 의도적으로 배치된 책 소품들... 카메라는 멍하니 응시한다. 아주 여유로운 흐름으로.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 걷는 장면들로 하여금 나는 어떤 메시지를 읽어야 헸었나? 나는 별론 데 왜 이렇게 호평 일색일까. 나는 왜 이렇게 인색한가. 내 감수성의 문제인가? EQ의 문제인가.


내친김에 책도 읽어보았다.



김보라 감독의 각본과 감독, 벌새. 스크립트 모음집 책 벌새의 뒷부분에는 인터뷰 모음집도 실려 있는데 ‘꼭 하고 싶은 거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걸 해내지 못하면 내가 미쳐버리고 말 거다’라는 느낌이 벌새를 통해 많이 ‘해소’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폭력적인 가장과 남자 형제가 존재하는 '82년생 김지영 세대'의 가족 분위기, 저때부터 시작된 강남 8 학군 중심의 빈부격차, 사회격차 등등.. 김보라 감독이 가졌던 가족을 향한 직간접적인 삶의 응어리를 작품으로써 드러내고, 공통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트리거로 작용하여 공개적으로 공유하며 치유하는 리햅의 카타르시스. 예술의 정서적 기능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하..ㅎ



가령, 인디음악을 싫어한다고 해서 자극적인 것에 중독된, 음악 들을 줄 모르는 ‘멍청한’ 대중이 아니다. 개취니까. 그런 까닭에, 이런 공감형 전형성에 특화된 콘텐츠들은 클리셰를 조심해야 되는데, 김보라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것이 기억났다. 감독은 클리셰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가장 자기 자신다운 작품을 하는 것이라 했는데, 엄... 벌새는 나의 눈으로 바라보면 클리셰와 ‘그 시절 그 소녀 st’의 아이콘 사이에서 변주쯤으로 보인다. 언니와 오빠 사이에서 치이는 막내, 하필이면 남친이 부잣집 순정남이고, 하필 언니의 가까운 사람들이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죽는다. 절친은 부모님 이혼으로 힘들어하고, 은희는 차라리 이혼이 낫지 않을까 싶은 집구석이며, 가장 따뜻하게 함께 오래 있고 싶은 어른은 죽는다. 94년도의 비극을 추모하는 것은 좋은데 소비하는 것은 왠지 꺼려진다. 세월호를 소재로 사용하는 건 난 보지 않을 것과 같은 이유처럼.


사실 이렇게 보편성에 호소하는, 복고주의 체험형 콘텐츠들은 호불호가 분명한 장점이자 한계점이 있는 듯하다. 응답하라 시리즈같이 그 추억과 배경을 공유하는 세대는 완벽히 몰입과 ‘94년도 패치 탑재’가 가능하지만, 직접적이지 않은 세대를 아우르기 위해서는 플러스알파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나는 왜 벌새를 즐기지 못했을까…

내겐 친구가 전부인데 친구는 같은 마음이 아니었던 중학생의 우정같은 맛?


작고 약해 보이지만 어느 새보다 빠르고 힘찬 날갯짓으로 비상하는 벌새. 글쎄, 벌새보다는 은희는 참새 같은 존재였다.



벌새 House of Humming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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