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ing me Softly
내가 복수를 할 수 있다면 고상하게 문과답게 하겠노라고 다짐한 적이 있다. 책한 권, 노래 몇 구절로 평온히 누리고 있는 일상을 흔들어 버리고, 단잠 조차 허락하지 않게 가위눌리게 하겠다고. 마치 야행성 동물처럼, 하루를 마감하고 누우면 시작되는 서늘한 저주의 땅거미, 결코 떨쳐버리기 힘든 죄책감으로 옭아매며 무의식을 지배하는 전략을 펼치겠노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그가 날 배신했음을 알아차렸을 때, 하필이면 그때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가 개봉을 했다.
에드워드와 수잔. 동창이었던 남녀의 몇 년 만의 재회, 사랑과 이별. 평범한 연인의 대단할 거 없는 클리셰와 사랑이야기.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으로 버려진 남자의 찌질한 집착이 아니다. 더 큰 사냥의 시간을 위한 일보 후퇴일까? 복수극이라고 분류하고 있지만 그의 공격에는 물리적인 파동도 없다. 책 소포 포장을 뜯을 때 베인 손가락 상처 정도?
수잔은 섬세하고 진심이었던 에드워드를 버리고 배신한다. 야망 있고 열정적이고 직진하는, 성공의 기회를 잡기 위해 꿈을 과감히 버리는 수잔. 자존감과 자기 확신, 절제와 꿈을 위해 현실을 잠시 뒷전으로 하는 용기를 가진 에드웨드. 수잔은 스스로 ‘다른 종류의 힘’을 가진 ‘착한’ 에드워드를 사랑해서 결혼한다.
그러나 가난과 현실은 사랑을 창문 밖으로 내몰아 버린다. 그녀의 운명을 바꿀 현재의 남편을 만나 야무지게 환승 이별하고, 에드워드의 아이를 중절 수술하면서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잔인하게 끊어낸다. 까리하고 모던한 웅장한 대저택, 갤러리를 운영하는 영 앤 리치 수잔, 잘생기고 열정적인 남편(실상은 바람둥이지만..)을 얻었다, 에드워드를 버리고. 불면증과 공허한 하루를 바쁘게 살지만 성공한 삶에는 늘 스트레스가 있다고, 성공한 사람들은 늘 자신에게 가혹하다며 합리화한다.
현재의 수잔에게 에드워드는 우리가 겪었던 일에 영감을 받아 진심을 다해 썼다며 곧 출판될 소설을 보내온다. 19년 만에. 녹터널 애니멀즈는 현재 시점의 수잔과 에드워드, 에드워드가 집필한 영화 동명의 소설 속 토니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액자식 구성으로 풀어나간다.
감독 톰포드의 미적 연출력은 야행성 동물에 대한 감수성을 아름답게 담아낸다. 희망적인 새벽, 포근하고 포용적인 아침이 아니라 낮과 밤 그 공간적 경계에 활동하는 짐승들의 시간으로 색감을 활용한다. 텍사스의 이글거리는 사막과 뉴욕의 차가운 도로가 황홀하게 교차된다. 순간의 선택에 따른 가장 예술적인 복수- 수잔의 직업과 가치관, 소설이 복수의 도구가 된다는 점, 현대미술의 공허함과 겉멋이라는 소재도 톰포드가 적극 설정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적막이 흐르고 누군가에겐 치열한 생존의 시간인 깊은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온다.
만약에 수잔이 에드워드의 소설을 하찮게 여겨 읽지 않았거나, 자기 투영을 하지 않았더라면 결말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 아닌가? 애초에 복수는커녕 녹터널 애니멀즈는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기억 못 한다.. 엿 같지만 가혹한 원리.
남편은 출장을 핑계로 밀회를 즐기러 떠나고, 수잔은 대저택에 홀로 남아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녹터널 애니멀스 소설 속 토니의 가족은 텍사스 마파로 자동차 여행 중 건달 패거리에게 시비가 붙는다. 인적 드문 깜깜한 사막 한가운데, 핸드폰 통신도 없는 공포스러운 공간. 아내와 딸이 희롱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차분히 상황을 해결하려고 한다. 극한의 공포에 맞서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결국 아내와 딸은 납치당하고, 다음 날 강간당하고 살해된 채 발견된다. 겁쟁이 나약한 가장 토니는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한다.
현실의 수잔은 손이 떨려 엄습하는 공포감에 책을 읽지 못한다. 딸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19년 전 에드워드와의 첫 만남의 추억을 떠올린다. 토니가 에드워드 자신이라면, 수잔은 왜 토니의 아내가 아닌 토니의 비극에 극도로 분노하며 괴로워했을까? 그 분노와 공포는 과연 누구를 향한 폭발적인 감정일까? 수잔의 욕망은 무엇을 향해 있을까? 선택권을 쥐고 있었던 주체적인 자기 자신? 에드워드를 향한 연민?
전화를 받지 않는 에드워드. 어렵게 만나기로 하고 약속을 잡는다. 섹시한 옷을 입어볼까, 짙은 립스틱을 지우고, 결혼반지도 뺀다. 현 남편에게 얻을 수 없는 애정을 기대하면서, 설렘과 야릇함으로 약속한 레스토랑에 도착, 앉아 하염없이 기다린다. 에드워드는 수잔의 삶에 책 한 권 보낸 것뿐, 오랜 시간 고요했던 마음과 망각에 흠집을 내고, 바람맞은 수잔의 인생은 그날 이후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왜 그렇게 글을 쓰려는 거야?”
“모든 것을 살아있게 하려고. 글로 남겨놓으면 영원하잖아
... keeping things alive”
20년을 기다려 완성한 에드워드의 도발, 오래전 끝난 사이라고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은 ‘나약한 남자의 이야기’는 현실의 수잔이라는 매개체로, 소설이라는 형태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Singing my life with his words (그는 내 인생을 노래로 말한다?)
Killing me softly with his words (그의 말들로 나를 부드럽게 죽이다??)
Telling my whole life, with his words (그는 내 인생을 통째로 말한다?)
그는 나에게 이 노래를 꼭 들려주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과생 마인드로 아무리 해석을 해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남자가 여자와 있었던 둘만의 이야기를 가사로 써서 천진난만하게 노래 부르는 거네, 마치 허구의 창작인 마냥. 현악기 줄이 튕겨질 때마다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 후끈후끈 심장이 쫄려오는 거야. 노래는 세상 부드러운데, 내 인생을 까발리니까 숨통을 조여 오는 거지 죽일 듯이.’
왜 그렇게 하필이면 저런 서사가 있는 노래였는지.. 마치 우리 둘의 더러운 끝에 대한 복선이었던 것인가... 우연히 찾아온 예술적 복수가, 에드워드가 내 삶의 영감을 주었다. 현실의 나와, 에드워드와 그의 페르소나 토니까지, 마치 3중 액자식 구성 놀음에 나는 최면이 걸린 듯했다.
넷플릭스에서 두번 더 봤다. 언제 또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