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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민 Oct 29. 2022

낯선 세계로의 이동


수요일 새벽이었다.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따지자면 무역회사와 책방 사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고 그나마 끄나풀이라면 책과 일상을 소소하게 끄적인 블로그가 고작이지만 나 홀로 원서를 지원한다고 손해 볼 일도 없었다. 이럴 땐 단순한 사고 회로가 참 유용하다. 한밤의 호기였는지 망설임 없이 잡코리아 웹사이트에서 대뜸 자기소개서 양식을 다운로드하였다. 학교, 회사, 지난 경력을 이력서에 간략히 넣고 자기소개서는 관련 경력도 지식도 없으니 자유 양식을 택했다. 그저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만 넣자는 심산이었다. 


마음 한 켠에는 퇴사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고 못해도 반년은 책만 보려 했는데 싶었지만 매달 월세만으로 퇴직금을 까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책방이라면 내 마음에 항변할 만한 면죄부도 쥐어줄 것 같았다. 문제라면 지금은 수요일 새벽 2시, 여행의 출발은 금요일 오전 10시 시간이 없었다.


목요일 밤 10시까지도 카페에 앉아 있었다. 한 달 만에 서울에 나타나 잡은 약속을 무작정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페에 앉아 책방에서 일을 하면 어떨지에 대해 마치 남일처럼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점점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리자 자기소개서의 가닥이 새로이 잡혔다. 밤 11시 집에 오자마자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어제 새벽 늦게까지 끄적여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초안을 친구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고 기다리는 동안 서둘러 수정 작업에 돌입했다. 


대화를 하다 보면 뜻과 방향이 뚜렷해질 때가 있다. 좋은 사람과 좋은 대화를 나눴을 때인데 이 날이 그랬다. 오히려 집에서 자기소개서를 쓰겠다고 혼자 끙끙 앓았다면 진척이 없었을 것이다. 책상에 앉아 쓰고 지우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보니 시계에 어느덧 AM 4:00가 찍혀있었다. 메일을 보내기엔 늦은 시각이라 아침에 발송할 요량으로 노트북을 덮고 이불로 뛰어들었다. 다음날 아침, 새벽까지 읽고 또 읽었던 걸 또다시 읽고 또 읽다 봄날의 안부를 끝인사로 담아 오전 9시 이메일을 발송하고 서둘러 당산역으로 향했다. 


“나 새벽 4시까지 자소서 쓰다 왔어.” 


직전 직장 동료이자 친한 언니인 L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호기롭게 책을 읽겠다며 퇴사를 선언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일산으로 향하는 빨간 버스 1500번 안에서도 이 뜬금없는 전개에 대해 설명하다 그저 운명에 맡겨볼 일 아니겠냐며 웃어넘겼다. 밤리단길 카페 PEACE PEACE 창가 자리에 앉아 햇살을 쬐며 정확히 앞으로 ‘어떻게 뭐 먹고 사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문자가 왔다.


"최인아책방이에요, 다음 주 화요일 면접을 볼 수 있을까요?"


무역회사 해외영업팀 대리가 최인아책방 매니저 면접이라니. 내세울 건 책을 좋아하는 마음뿐인데 마음은 꺼내어 크기를 가늠할 수도 무게를 잴 수도 없으니 증명할 길이 없다. 나는 면접을 볼 때면 생각하는 게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고 오자. 면접관도 밖에서 만나면 옆집 아줌마, 아저씨다. 나와 일을 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부른 호감의 자리이지 나를 비난하려는 의도로 부른 것이 아니다. 과장해서 포장한 모습으로 입사하면 어차피 적응하지 못할 것이고 그건 회사에게도 나에게도 마이너스일 뿐이다. 정신 승리라 불러도 좋다. 뭐든 부담 없이 임해야 결과도 좋은 법이니까! 물론 눈앞에 나타난 기회를 탱자탱자 하다 놓칠 수는 없으니 친구와 화상 회의로 모의 면접을 진행할 만큼 지금 나는 진심이다. 


면접 전에 최인아책방을 방문한 건, 세 번이 전부였다. 그 마저도 3층 '혼자의 서재'에서 진행한 행사였으니 4층 최인아책방의 문을 연 건 처음이었다. 근사한 샹들리에가 걸린 유럽의 어느 살롱 같은 책방으로 들어서 복층으로 올라가니 정면엔 최인아 대표님, 옆자리엔 정치헌 대표님이 앉으셨다. 증명사진이 실물과 다른 거 아니냐는 농담, 진심이셨나. 그 농담과 함께 질문이 시작되었다.  


“최인아책방이 왜 인생의 전환점이에요?”

“회사 다닐 땐 어땠어요?”

“다른 분야에서 일하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어요?”

“책방 일이 보는 것과 달리 우아하지만은 않아요, 괜찮겠어요?” 


더도 덜도 말고 그냥 그대로만 하자, 그대로만.


책은 개인이 읽어내는 속도보다 곳곳에서 찍어내는 속도가 더 빠르고 범위 또한 무한해서 한계가 없잖아요.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날 수는 없어도 책이라면 누구나 만날 수도 있고요. 어려운 순간엔 늘 책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 


최인아책방에 대해, 나에게 있어 책의 의미에 대해 심도 깊은 질문들이 오갔다. 연달아 연봉은 어느 정도 생각하냐는 물음에 ‘떡볶이 먹고, 겨울엔 붕어빵 먹고, 책 사볼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했더니 우리가 밥이라면 먹고 싶은 대로, 또 책이라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다며 화답하던 대표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갖가지의 질문들이 오가는 사이 순식간에 면접은 끝이 났고 다음날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오늘 오후에 볼 수 있을까요? 다른 책방 식구와도 만나보면 좋을 것 같아요. 급히 연락해서 미안해요!” 


저녁을 먹고 시골로 내려가려던 엄마는 문자를 슬쩍 보더니, 얼른 가겠다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늘만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매무새를 가다듬고 이번엔 최인아책방의 2호점인 GFC점이 자리한 역삼역으로 향했다. 빨간 벽돌 건물로 운치 있는 선릉과 전혀 다른 테헤란로의 한가운데 으리으리한 빌딩 강남파이낸스센터 1층이었다. 높다란 회전문을 통과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청록색 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생각의 숲이라는 슬로건이 어울리는 정원 입구를 지나 회의실로 향하니 최인아 대표님과 2호점의 정지현 매니저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면접에서 기억에 남는 건 매니저님의 첫 질문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최인아 대표님이 ‘실무자로서 알려줄 거 있어요?’하고 발언권을 넘기자 '낮엔 책방 일하느라 종종 밤에 북카드를 써야 해요. 괜찮아요?'라는 질문이었다. 오잉, 대표님을 코 앞에 두고 저런 말을? 놀란 마음은 눈치껏 감췄는데 시선은 자연스레 대표님을 향해버렸다. 그런데 정작 대표님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맞는 말이라며 끄덕이고 있었다. 이 솔직함은 도대체 뭐지? 


면접을 마치고 나오자 어안이 벙벙했고 소감이라고 하자면 수다스러웠다. 자고로 면접이라 하면 나를 어필해야 하는데 큰언니, 작은언니, 막냇동생 셋이서 수다를 떨다 나온 기분이었다. 아, 좀 더 임팩트 있는 답변을 할 걸, 무슨 말을 한 거지? 갸우뚱했더랬다. 그런데 우려와 달리 다음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최인아예요. 같이 일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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