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으로 출근하는 나날은 신기함의 연속이었다. 줄지어 늘어선 책상들도, 커피로 수혈을 이어가며 일제히 모니터를 노려보는 회사원도 없는, 오롯이 6000권의 책으로 둘러싸여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공간으로의 출근이라니. 나에겐 정답지와도 같은 책들이 가득한 공간에 머무니 안락함마저 들었다.
매일 입고되는 신간들은 제목을 살피고 표지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지식이 차올라 나를 충만하게 만들어 풍족한 느낌이었다. 그뿐인가. 공간이 주는 힘은 실로 대단해서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때도 있었다. 파티션으로 칼같이 나눠진 오피스로의 출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난관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무역회사는 객관식이다. 내가 땅길, 바닷길, 하늘길을 뚫을 수 없으니 존재하는 선택지 중 고르면 되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운송 방법은 항공, 해상, 육로 중 고르고 도착지는 최종 목적지와 가까운 공항, 항구, 도시를 고르면 된다. 심지어 명확한 기준도 있다. 최소 비용 또는 최단 거리 또는 고객의 요구이다. 무수한 선택지가 존재해서 끊임없이 갈림길에 놓이지만 또렷한 기준이 있으니 비교우위를 잘 따진 다음 선택하고 고객사를 설득하고 스케줄대로 진행하면 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천재지변이나 인재 등 숱한 변수가 등장해서 롤러코스터를 타야 하지만 적어도 모두 객관식임은 확실하다.
헌데, 책방 일은 서술형 주관식인 데다 때로는 문제가 없는데서 문제를 찾거나 정답이 없는데서 정답을 발견하는 신대륙 개척과 같은 일이다. 최인아책방이 하는 일이 단순히 도서 판매에 그치지 않고 '생각의 숲'이라는 슬로건 아래 좋은 콘텐츠를 생산하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함께 일하는 책방 식구들은 광고계에서 오랜 세월 커리어를 쌓아왔거나 매거진을 제작해온 무에서 유를 만들어온 분들이다. 내게는 소재를 발견하는 것조차 생소한데 소재가 정해지면 단단한 뼈대를 세우는 구성을 하고 구체적인 스토리까지 잡아야 한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사고 회로를 굴리는 내 머릿속 톱니바퀴만 삐걱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처음엔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입력하면 되는 줄 알았다. 기획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브랜더들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해 기획, 브랜딩 관련 책들을 모아 읽기 시작했고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마케터, 내로라하는 브랜더들을 팔로우하고 그들의 생각법과 일상, 소재를 풀어가는 과정을 매일 같이 들여다봤다.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직접 경험도 점차 늘려갔다. 새로운 커뮤니티에 가입하고 모임에 나가 다른 직군의 사람들을 만나 신선한 이야기도 귀담아듣고 색다른 경험도 이어갔다. 몸 담고 있는 조직에 따라 개인이 변할 수 있음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이 개인의 성장에도 힘이 되는 일이라 안도하기도 했다.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도 부지런히 찾아보고 배워가며 조금씩 책방 일에 적응해갔다. 책방에서 일한다고 하면 비가 오는 날이면 커피 한 잔에 느긋하게 책장이나 넘기고 있을 것 같지만 실상 잔잔한 호수의 백조와 같다. 매일 저녁 좋은 프로그램들이 열린다는 건 누군가는 그만큼 애쓰고 있다는 말이다. 매월 신간 저자 북토크는 물론 논어, 미술사, 글쓰기, 책방콘서트, 북클럽 등 꾸준히 행사들이 진행된다. 연사 섭외부터 행사 안내, 홍보, 모객, 인원 관리 및 현장 세팅까지 매일 저녁 가득한 행사들을 챙기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저문다.
1년에 수만 종이 넘는 책이 출간되는데 이달의 북토크로 선정할 도서를 살피고, 연사 섭외를 위해 출판사에 컨택하거나 메일로 제안 온 도서들을 샅샅이 살핀다. 확정이 되면 연사와 책방이 가능한 일정을 조율하고 강연 형식, 강연자료, 유튜브 촬영 여부 등 세부 사항을 조율한다. 책과 일정이 확정되면 촬영팀에 공유하고 디자인팀에 홍보 문안을 작성해서 넘긴다. 모객이 진행되면 개별 확정 문자를 발송하고 문의가 들어오면 일일이 안내한다. 북토크 당일까지도 출판사와 저자와 끊임없이 연락하고 당일 독자분들을 책방에 모신다.
끝이 아니다. 최인아책방은 외부와도 여럿 연결되어 있다. 기업의 워케이션 공간을 기획하거나 주제별 도서를 큐레이션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연을 맺은 공간에 매달 북카드와 함께 신간 도서를 매달 업데이트해 보낸다. 그 외에도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이 과정을 거의 매일 저녁 열다 보면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금세 일 년이 지나간다.
닮은 듯한 하루를 반복하는 것 같아도 책방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훌륭한 분들의 강연을 귀동냥으로 들으면서 배운 것은, 무작정 입력한 정보들을 언제 어떻게 출력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란 것이다. 동시에 똑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콘텐츠가 완성된다는 것도 눈앞에서 지켜봤다. 독서, 산책, 모임, 콘텐츠 관람 그것이 무엇이든 직접 경험하고 나만의 언어로 풀어보는 과정이 성장의 첫걸음이라는 걸 배우는 시간들이었다. 물론 일상에 새로움을 한 스푼 더하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신나고 재미난 일일지라도 누군가에는 스트레스이자 부담일 수 있다. 그런데 원하는 일이 있다면 귀찮음에, 피곤함에, 굳이 지금 이걸? 굳이? 물음이 올라올 때 그냥, 그냥, 그냥 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정답 없는 곳에서 정답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적어도 조급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좋아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오래 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