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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민 Oct 29. 2022

돌풍이 될 줄도 모르고



퇴사하기 8개월 전의 일이다. 우연히 3년 전 일기장을 펼쳤는데 ‘꿈’ 옆에 나란히 ‘작가’라고 쓰여있었다. 작가? 내 일기장인가? 험난해도 나름의 재미를 찾아가며 직장 생활 중에 대뜸 작가라고? 이게 일기의 매력이다. 까마득히 잊힌 한 순간으로 훅 밀어 넣어 그 순간에 우뚝 서게 만든다.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다거나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는지는 없었다. 며칠 동안 머릿속엔 물음표만 떠돌다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밤, 이것이 돌풍이 될 줄도 모르고 블로그를 시작했다. 처음엔 일상을 기록하는 글을 나중엔 혼자서 하던 독서 리뷰를 남겼다.   


    정연진 ‘왓슨빌’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오프라 윈프리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  

    김영하 ‘말하다’  

    캐럴 피어슨 ‘나는 나’  

    미셸 오바마 ‘비커밍’  

    무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책이라는 테마로 색깔이 묻어 나니 자연스레 다독가 이웃들이 생겼고 종종 올리는 일상 이야기에 공감과 댓글이 늘기 시작했다. 국제 도서 소개 릴레이, 코칭 질문 릴레이처럼 블로그 속 소소한 이벤트들로 소통의 기회가 늘면서 이웃들과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그중엔 뉴질랜드로 이민 간 워킹맘, 미국으로 떠난 국어 선생님, 시골 분교의 초등학교 선생님,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 이직을 고민하는 직장인, 아무튼 국경과 나이 제한 무엇보다 편견 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공간에 조금씩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웃'이라는 다정한 단어 속 그들은 나와 직종도, 환경도, 나이도, 사는 나라마저 달랐다. 나의 일상이 한 편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면 그 도화지에 엄청난 색감들이 빠른 속도로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코로나로 모든 모임과 외출마저 자제하던 시기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웃들의 일상 글이 나의 유일한 외출이자 여행이 되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힘을 체감하는 인생의 첫 경험이었다.


그들과의 소통 수단은 오로지 글.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해온 일이라면 딱 하나, 일기 쓰기. 블로그가 일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 점점 읽고 쓰는 재미에 빠져 급기야 퇴근 후에 새벽 두세 시가 넘도록 읽고 쓰기를 반복했다. 아침 6시 반이면 출근을 위해 일어나야 했으니 수면시간이 3-4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일상에 활기가 넘쳤다. 그게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을 가지고 있다는 건 대단한 활력이 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빛나는 이유이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을 무렵, 회사와 블로그를 향한 무게 추가 반대로 기울기 시작했다. 출판사 서평단을 신청하는 족족 당첨되었고 신간들 중 읽고 싶은 책들은 모조리 신청해 마감일까지 완독하고 장문의 리뷰를 썼다. 월요일은 퇴근 후 새벽 두 시까지 읽고, 화요일은 퇴근 후 새벽 세시까지 쓰고 이 패턴 한동안 반복했다. 빠르게 늘어난 3,000명의 블로그 이웃들은 그 즐거움에 가속도를 붙이기 충분했고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아침은 점점 더 장애물로 변해갔다.


신나게 내달리는 블로그와 달리 퇴사 절차는 지지부진했다. 퇴사 결정이 단순했다고 과정도 그런 건 아니다. 결정은 혼자서 하지만 과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최종 퇴사일을 받기까지 꼬박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단숨에 훌러덩 벗어던지려 했으나 그리 간단했다면 노동의 굴레라 불리지 않았겠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직장에서 능력치를 가감 없이 평가받는 순간은 퇴사 선언 직후이다. 이름을 뒤따를 직급, 올라가는 연봉 앞자리, 새로운 팀 구성, 계열사 이동 건실한 선택지들이 눈앞에 차려졌다. 어디선가 월급보다 심각한 마약은 없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단칼에 No를 외치던 초반과 달리 거절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불어나는 조건들에 꼬리를 잡히기 시작했다. 나의 결정이 지나치게 단순했던 건 아닐까 실없는 의심이 솟구치고 현실에 흔들리는 나를 보는 게 적잖게 안타까웠다.


그러나 퇴사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되돌리는 순간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같은 곳으로 꾸역꾸역 출근해야 한다, 나를 회유하려는 말들은 언 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하다, 사장은 바뀌지 않는다 고로 조직의 사상과 분위기도 바뀔 리 없다. 더욱이 그때의 나는 온종일 읽고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내내 책을 읽거나 쓰기만 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이 얼마나 속 편한 소리인가. 그래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우선순위에 둬야 하는 말은 '행복할 것 같았다’이다. 행복이 예상되는 바라면 실행해야 옳다. 현실적인 문제를 따지자면 50000번의 번민을 거쳐도 즉답은 나오지 않는다. 걱정만 앞세워 진전되는 일은 없다. 퇴사를 갈망하던 순간을 떠올리고 눈을 질끈 감고 설득과 회유의 단계를 지나면서 한 고비를 넘겼다.


그래도 갈 길은 멀고 퇴사란 산 넘어 산이다. 힘겹게 외부의 적을 물리치면 타노스 같은 최강 적군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내 안의 소심한 악마. 마음 구석 한편에 똬리를 틀고 사는 의심과 불안이라는 영악한 악마의 속삭임에 지는 밤도 있었다. 취업사이트를 얼쩡거렸다. 도서관은 괜찮지 않을까, 교직원은 원래 꿈이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월급이라는 고정수입에 미련이 뚝뚝 핑곗거리를 찾아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 동그라미 안에 남으려 애쓰고 싶었다. 짐짓 모른 척 현실 앞에 무릎 꿇고 원위치로 돌아갈 뻔했지만 내 안의 소심한 악마 너마저 장렬히 무찌르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직장은 하루 동안 눈을 뜨고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는 곳이다. 그러니 퇴사를 한다는 건 나와 그토록 함께했던 사람, 장소, 시간 모든 것들을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나만 쏙 떠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의 선택으로 발발한 자발적 이별인셈이다.


열심히 살아낸 시간이었던 만큼 고민해도 괜찮다. 흔들려도 괜찮다. 긴가민가한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씩 꼼꼼히 따져봐도 된다. 그런데 모든 이별에는 이유가 있듯 그것들을 내려놓고 떠나려 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저 다음 해 이맘때쯤, 그때 '퇴사하길 잘했어 다행이야'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들어가자고 결론짓고 가뿐히 미련을 털어냈다. 마침내 고속도로 하이패스를 통과한 기분이었다. 핸들을 꽉 잡고 원하는 방향으로 직진만 하면 될 것 같은 그날, 나는 퇴사일을 받았다.

    

끈덕진 퇴사 과정을 거쳐 드디어 출근이 사라지고 4년 만에 본가 시골집에서 꼬박 한 달을 보냈다. 당시 세 살배기 조카 현이의 어린이집 하원을 기다렸다 땀이 뻘뻘 나게 뛰노는 아이에게 물을 건네고 하루에도 똑같은 놀이를 50번씩 반복하는 육아 봇이 되었다. 우당탕탕 으아아앙 소란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포근한 사랑이었다. 


꿀 같은 휴식은 언제나 짧은 법! 한 달 후, 안양천에 흐드러지게 벚꽃이 피어나던 4월 나는 매월 50만 원, 두 달이면 100만 원이라는 월세의 묵직함을 어깨에 지고 무직인 채로 서울로 돌아왔다. 퇴사의 목적이 읽고 쓰기였으니 5평 남짓되는 원룸에 과한 110cm 원목 책상을 들였다. 5평은 매트리스가 놓인 침실 2평, 책상을 들인 서재 1평, 옷장 1평, 부엌 1평 빈틈없이 채워졌다. (우리 집은 침실, 서재, 옷방, 부엌이 다 있어!라고 생각하며 산다.) 집에서 온종일 읽고 쓸 테니 살림살이도 갖춰야지 하고 달달한 믹스커피 한 통과 영등포 타임스퀘어 모던하우스에서 예쁜 유리잔도 마련했다. 좁은 방에 혼자 머무는 시간이 많을 테니 아껴둔 그림도 벽에 내걸었다. 제주 푸른 숲에서 백마가 노니는 좋아하는 김초희 작가의 그림이었다.  


방이 구실을 갖춰갈 때쯤, 여행 출발일이 다가왔다. 입만 열면 책 타령을 할 때라 친구 L은 나를 데려가려 파주 헤이리 마을의 북스테이 ‘모티프원’을 예약해줬다. 이 무렵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읽던 책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가 심리치료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가제본을 한창 읽고 있었다. 잠들기 전, 금요일 오전 10시 출발을 약속을 잡고 의미 없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카드 뉴스 한 장, 책으로 가득 찬 서가를 배경으로 청록색 바탕이 깔리고 그 위로 몇 줄의 문구가 있었다.    


    책방에서 일하고 싶은 분  

    최인아책방에 호감이 있는 분  

    기획부터 홍보, 관리까지 다양하게 경험하며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음  

    12~7시 근무이나 저녁 행사가 있을 때 종종 야근 있음   


최인아 책방의 직원 모집 공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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