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최인아책방 선릉점 매니저 백정민입니다.
나를 소개하는 한 문장이 바뀐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직전엔 해외영업팀 Rachel이었고, 또 그 전엔 물류영업팀 Mina였다. 8년 가까이 무역회사에서 숱하게 불리던 이름이 더 이상 불리지 않게 되던 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구나 직감했다.
직장생활 8년 차가 되던 해이자 코로나 시국의 한가운데 서서 두 번째 퇴사를 선언했다. 세상은 팬데믹으로 떠들썩했고 수많은 직장인들이 예측 불가한 앞날에 마음먹은 퇴사를 미루고 미루던 시기였다. 섣부른 판단은 아니었지만, 퇴사를 선언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나의 결정은 늘 단순했다.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떠날 때도, 첫 번째 퇴사도, 부산을 떠나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할 때도 뒷일을 염려치 않았다.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기대감만을 안은 채 다음 전개는 당도하고 나서야 마주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가벼운 결단력은 대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지만 때로는 쓰라린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감사한 날도 얄미운 날도 있었지만 별 수 없는 나였다. 아무리 그래도 스무 살도, 서른도 아닌 지금, 이 어수선한 세상에서 퇴사를 선언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언제나처럼 사고의 회로는 단순했고 뜬금없이 결단력 있는 것마저 나다웠다.
"퇴사하겠습니다."
같은 분야에서 8년 차라면 퇴근하면 일머리 스위치를 끌 수 있고, 보통의 업무 스트레스는 내성처럼 감내할 수 있다. ‘돈을 주고 가는 학교도 힘든데 심지어 돈을 받는 회사야 당연하지.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뭘’ 힘없는 푸념 같지만 내게는 썩 유용한 주문이었다.
유독 힘든 날이면 어떻게 마음을 달랠지 제법 효과적인 대처법도 터득했다. 볕 좋은 테라스에서 쫀득한 아인슈페너 한잔이면 평일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다. 날이 쌀쌀해질 때면 핏이 딱 내 것인 값비싼 코트를 큰 마음먹고 할부를 긁는 순간도, 매월 야금야금 모은 쌈짓돈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 짧은 단맛에 취할 때도 그랬다. 세상엔 착실히 벌어 즐겁게 쓸 일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외면하기엔 이미 월급의 맛을 알아버린 후였다. 버는 힘듦보다도 쓰는 즐거움이 크다는 부등호를 일찍이 찍은 셈이다.
그럼에도 퇴사를 선언한 건 9시부터 6시까지 회사에 머무는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순간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힘든 날도 있었지만 해가 쌓일수록 전문지식도 늘어갔고 나 또한 성장하고 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직업이었다. 워킹타임 9시간만 버티면 15시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9시간도 내 인생 아닌가?
그렇다고 단번에 퇴사를 할 수는 없다. 그럴 때면 매달 나가는 월세와 생활비, 적금, 카드값을 떠올리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한계점을 넘어서면 나는 황망히 떠나간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는 누가 봐도 90년대 가장을 떠올리는 삶이었다. 새벽 일찍이 일어나 부지런히 일터로 나갔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통닭 한 마리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분이었다. 고된 하루의 끝에 두 딸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그의 낙이었을 것이고 내일도 이 일상이 반복되리라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랬던 그는 자식이 보내주는 효도 관광 한번 떠나보지 못한 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평범하게 보낸 오늘은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던 내일이라는 하루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에 나는 덧붙여 생각한다. 우리의 오늘은 누군가는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뜻하지도 않게, 한 순간에 잃어버린 하루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내일이 있을 거라는 가정은 불완전하다. 문득 나의 첫 퇴사를 함께했던 친언니에게 전화했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언니가 그때도 내가 똑같은 말을 했다며 옅게 웃었다.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열심히 한 게 아냐, 나 지금 불행해."
맞다, 그땐 그랬다. 4년 전 어렴풋이 이 대사를 던지는 모습이 스쳤다. 하지만 한 번의 퇴사 이후 다시 4년이 지난 시점에 나는 또 달라져 있었다. 확실히, 충분히 행복했다. 단지, 삶의 방향을 틀어야 하는 순간이 왔다는 생각에 잠시 멈추는 것뿐이었다. 그땐 모든 걸 내던지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일시정지임을, 다시 출발할 힘을 충전하고 방향을 틀어야 하는 시간임을 알고 있었다.
예전엔 누구나 이쯤은 힘든 거니 나약한 소리는 넣어두라고 버티는 것만이 능사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힘겨움은 어디에 넣어둬야 할까? 몸과 마음 어느 쪽일까? 나태와 성실의 경계를 세우기란 무척이나 어렵지만 나태라고 치부하기에 우리는 이미 매일을 너무 애쓰고 살고 있다. 사과도 썩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으면 전체가 곰팡이에 잡아먹힌다. 나약한 것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썩은 부분을 모른 척 도려내지 못하는 것이다. 무탈하게 굴러가는 현재를 문제 삼아 관성의 힘을 거스르는 일은 지금보다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한 일로 그거야말로 강인함이 필요하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관성을 거스르고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제에서 벗어날 현명한 방법이나 긴 세월에 걸쳐 쌓아 온 깊은 통찰력이 내게는 없음을 고백하며 시작한다. 단지 이 이야기로 당신과 연결되기를 바란다. 무탈한 현재에 제동을 걸었던 용기, 꼬리를 자르기까지 흔들렸던 순간, 좋아하는 일을 만나기까지의 과정, 그래서 지금의 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어느 날은 코끼리 발톱처럼 단단하다가도 어느 날은 여전히 병아리 눈물처럼 나약하고 불안한 나로 당신과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날이 있으니까.
당신이 나에게, 내가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