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나 필통 좀 봐도 돼?
학창 시절 왜 그리 남의 필통이 궁금했는지 모른다. 그 나잇대의 의식이었나. 친해지고 싶은 친구에게 건네는 ‘너와 친해지고 싶다”의 다른 말이었나. 네 것이 궁금하고, 다음 내 것을 내어준다. 같은 것이 있으면 공통분모를, 다른 것이 있다면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았으니 그렇게 친구가 되어갔다.
더 이상 펜과 필통에 관심이 줄어들 즈음. 소재는 파우치로 옮겨갔다. 친구들의 립밤도 궁금하고 어떤 파우더를 쓰는지도 궁금하다. 생전 써 본 적 없는 오렌지색 립밤을 쓰는 친구를 보고 나도 시도해 볼까 콩알만 한 용기가 생긴다.
필통도, 파우치도 필요 없는 아줌마가 되었다. 내 업무와 임무는 모두 집에서 이루어진다. 화장도 사치, 그나마 무릎 나오지 않은 운동복을 입는 것으로 출근준비를 마친다. 이제 그럼 오늘 저녁 메뉴를 정해볼까. 아줌마가 되면, 아니 주부가 되면 세상 근심 모두 사라지는 줄 알았다. 상상 속의 전업 주부의 모습은 늘 홈드레스를 입고, 아이들과 웃으며 있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상상은 상상이다. 과거의 고민은 사라질 뿐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오늘 저녁은 또 뭐 먹지? 역시 해답은 동네 맘카페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면 추천템이나 본인이 장 봐둔 사진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먹어보니 좋았고, 어떤 품목은 비 추천이다. 대부분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이를 위한 추천템들도 있고, 가끔은 자신만의 비법을 올려두기도 한다. 역시 아줌마라는 공통점 하나로 모두 하나 되는 평화로운 곳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슬슬 남의 장바구니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온라인 마트의 후기는 필수다. 딸기잼을 들여다본다. 맛은 어떤지, 많이 달지는 않은지 궁금하다. 하지만 궁금한 건 그 딸기잼과 함께 어떤 다른 것을 샀을까였다. 베이글을 사볼까. 아니면 식빵이냐 스콘이냐. 그리고 그것 외에도 어떤 새로운 품목이 있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려 본다. 한참 후기를 돌아다니던 중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린 시절 필통을 구경하던 내가 이제는 남의 집 장바구니를 구경하고 있구나.
추운 겨울 주말이면 으레 대형마트를 간다. 추위도 피하고, 커피도 마시고, 주차 걱정도 없다. 게다가 식사준비를 위한 장까지 한 번에 볼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금상첨화 아니겠는가라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남편을 마트로 잡아 끈다. 커다란 카트에 천둥벌거숭이 같은 둘째를 제일 먼저 실어 두고 이리저리 구경을 한다. 오늘은 어떤 것을 사볼까. 뭐니 뭐니 해도 그 순간만큼은 남편의 사랑한다는 말보다 마트 직원의 ‘타임세일'이 더 반가울지도. 누구보다 빠르게 줄을 서서 반값세일이라는 타이틀을 단 묵직한 주꾸미 봉지를 뿌듯하게 바라본다. 이 봉지를 손에 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알뜰하고 누구보다 집을 반짝반짝 가꾸는 프로페셔널한 주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반값 주꾸미 봉지를 손에 쥐었으니 다시 릴랙스를 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아니 내일은, 아니 또 그다음 식사는 어떻게 하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 일이 아니라는 듯 남편은 자신이 원하는 막걸리가 이미 카트에 놓였으니 빨리 집에 가자고 재촉하지만 주부에게 마트란 그냥 쉬이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헤매고, 때로는 내 옆을 지나는 카트를 주위 깊게 봐야 할 것이다. 내가 모르고 지나친 새 아이템들이 옆 카트에 가지런히 놓여 있을 수 있으므로.
때로는 가득 담긴 카트가 내 옆으로 지나갈 때는 놀라움의 눈으로 바라본다. 다 얼마 일까. 물가가 이렇게 올라, 반도 채 차지 않은 우리 카트 속 물건들을 계산해 보며 덜덜 떨고 있었는데, 위풍당당 쇼핑 물품들을 가득 싣고 지나가는 카트를 나도 모르게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본다. 게다가 고기를 가득 담은 카트를 볼 때면 부러움과 경외가 동시 느껴진다. 저게 다 얼마일까. 이번에는 이미 많이 담아 가격이 좀 나올 것 같으니 1+1 하는 고추장은 다음에 사자며 살포시 내려놓은 내 손이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결혼 전에는 미처 몰랐다. 아니 내가 돈을 벌기 전에는
“직장만 잡으면, 월급만 받으면 기필코 백화점에서 쇼핑백을 주렁주렁 들고 나오리!”라는 결심이 무색하게 돈을 벌고, 결혼을 하니 물건 하나에 더 덜덜 떨게 되었다. 신혼살림을 준비할 시절 딱 한번 카트를 가득 담아 나온 적이 있었다. 소금, 설탕 하나 없는 살림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장보기였는데 그 가득 담긴 카트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까.
다른 이들의 카트 구경과 시식코너를 한 번 도는 것으로 드디어 마트 장보기는 끝이 난다. 마치 미로를 탈출하는 듯 남편은 차가 막히기 전에 어서 집으로 피하자며 빠른 발걸음으로 나선다. 대충 장 볼것들은 다 담은 것 같은데 왠지 마트를 빠져나가는 내 발걸음이 너무 무겁다. 조금만 있으면 다른 것들이 타임세일을 할 것만 같고, 다른 이들의 카트를 구경할 것도 아직 한참 남았는데 말이지.
분명 즐거운 나의 집이지만 주말이면 집으로 들어오는 그 마음이 두 번째 출근인 것만 같다. 출근하는 이의 마음이 새털처럼 가볍지 많은 않을 터. 마음만큼이나 무거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마트에선 가벼운 마음으로 이것저것 꽤 담았더니 집에서 정리할게 또 산더미다.
친구들의 필통이 궁금했던 소녀는 시간이 지나 친구와 화장품 정보를 공유하고, 또 시간이 흘러 이제는 다른 집 장바구니가 궁금해진 아줌마가 되었다. 더 나이 들어 지금만큼 살림에 관심이 사그라 질 때는 또 어떤 관심사가 생길까. 아이들이 자라면서 옆집 친구의 입시정보와, 더 나아가 옆집 할머니의 노후대비 플랜이 궁금해지는 날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혹시 자식들이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는 푼수 할머니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는 모든 일이 스타카토처럼 떨어져 있는 줄로만 알았다. 하나의 일은 다음의 일과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는 듯 파우치에서 장바구니로 이어지듯 이어져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삶이다.
방학이다. 아이의 삼시 세 끼를 준비해야 할 때.
나는 오늘도 다른 이들의 장바구니를 기웃거려 본다.
오늘은 또 뭐 해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