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종합건설사 입사부터 퇴사까지

대기업, 중앙공기업, 지방공기업을 경험한 13년 차 K-직장인 이야기

by 행복추구권
명함의 이름표가 바뀔 때마다 나는 비행기 창밖의 하늘처럼 매번 다른 고도에 서 있었다.



어느덧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3년 차가 되었다. 강산이 한 번 변하는 시간 동안 나는 세 곳의 명함을 가졌고, 두 번의 짐을 쌌다.


첫 직장이었던 대기업 건설사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사회초년생 때부터 건설사의 수직적이고 거친 조직문화에 '나'를 끼워 맞추는 데 서툴렀다.


불합리함을 마주하면 침묵하기보다 내 목소리를 내야만 직성이 풀렸고, 그 대가는 직속 상사와의 불협화음이었다. 결국 나의 첫 직장생활은 4년 8개월 만에 '선 퇴사 후 이직'이라는 과감한 마침표로 이어졌다.


8개월간의 백수 취준생활 끝에 중앙공기업에 경력직으로 입사했고,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연수원에서 두 번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인생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법. 교육 중 중앙공기업 입사 전에 최종면접까지 진행했던 수도권 소재의 지방공기업으로부터 추가합격 통보를 받았고, 나는 다시 한번 짐을 꾸려 지금의 세 번째 직장에 안착했다.





남들과는 조금 달랐던 시작



나는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졸업이 가까워지며 같은 학과 동기들은 대부분 'OO전자'와 같은 반도체 업계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 기회가 있을 거라 믿으며 대기업 종합건설사라는 정글에 첫발을 내디뎠다.


입사 후 당시 회사에 도입 초기였던 '신입사원 의무 현장 장기파견 교육 프로그램' 따라 해외 화공플랜트 건설현장으로 향했고, 1년 넘게 현장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나의 첫 부서는 직무에 따라 전기공사팀으로 배치되었다.


프로젝트 초기, 전기공사가 시작하기도 전인 시기였기에 광활한 대지 위에서 팀장과 현지 여직원,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단출하게 근무를 시작했다.


사회생활의 첫 사수이자 직위자였던 전기공사팀장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 둘도 없는 '여미새(여자에 미친 새끼)'로 판명 났다. 같은 부서에 근무하며 그의 옆자리를 지키면서 볼 꼴 못 볼 꼴을 다 겪은 후, 나는 자의에 의해 공무팀으로 부서를 옮길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별도 콘텐츠로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공무팀에서의 업무는 생소했다. 현지인 채용(비자 신청) 및 신규직원 교육부터 문서 수발 체계 세팅, Document Room 구성, 건설장비 임대 계약과 자재 관리 업무까지 전기 엔지니어라는 직무 정체성이 무색할 만큼 잡다한 업무들이 쏟아졌지만, 적어도 팀장은 '여미새'가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했다.


이후 제어공사팀이 현장에 새롭게 조직되면서 또 한 번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해외플랜트 건설현장 오지생활은 외로움과 고단함이 늘 함께 했다. 연중 영하 28℃ ~ 영상 44℃를 오가는 내륙국가의 극한의 날씨에 적응하는 것 또한 힘들었지만, 함께 파견 나간 동기들과 같은 팀 동료들이 큰 의지가 되었다.


제어공사팀에는 한참 나이 많은 구수한 선배들이 있었고, 인도, 필리핀, 파키스탄 등 다양한 국적의 글로벌 스태프들이 있어 즐겁게 지냈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경험을 한 것 같다.


영하 28도의 혹한과 영상 44도의 폭염 사이, 현장생활의 하루를 닫는 위안은 이 붉은 노을이었다.





본사 복귀, 그리고 시작된 '파견 돌려막기'



파견근무생활은 13개월 만에 종료되어 복귀하게 되었다. 복귀 이후에는 플랜트 설계부서에 인사발령을 받아 꿈에 그리던 본사 근무가 드디어 시작되는 듯했다.


하지만 안도감은 짧았다.


설계부서임에도 주요 고객사(발주처)의 요구사항에 따라 현장으로 파견근무를 가야만 했고, 해외현장에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현장으로 파견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여자친구(지금의 아내)는 그 소식을 듣고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의 우리는 몰랐다. 잦은 이별과 기다림이 우리를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지, 그리고 그 끝에 결국 '나의 일상'을 지켜낼 선택을 하게 될지를.



현장에 출근하여 만나게 된 직속상사와의 첫 면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임팩트를 남겼다.


나는 내가 야근하고 있는데 옆에 아랫것들이 없으면 기분이 나빠.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던 이 직속상사와는 파견근무기간 중 큰 트러블이 있었고, 처음으로 이직 생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도 별도 콘텐츠로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이후에도 나는 본사보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기간이 더 길었다. 진급 누락한 선배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장기휴가를 떠났을 때나, 계약직 선배의 계약연장으로 인해 재입사 중에 공백이 생기면 단기로 현장에 인력 땜빵이 필요했다.


이런 일은 생각보다 비일비재했고, 설계부서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의 절대다수가 본사근무를 선호했던 탓에 선배들에게 밀리고 밀려 저연차에 미혼인 내가 늘 0순위 투입인력이 되었다.


본사에서 해외 프로젝트 입찰업무에 집중하려 하면 어김없이 현장파견 이야기가 나와 짐을 싸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열정은 서서히 마모되어 갔고, 피로도가 쌓여 갔다.


결정타는 근무평가였다. 당시 설계팀의 부서장은 면담 자리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직급이 낮고 업무가 선배들에 비해 경미해서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이해하지?



성과가 아닌 '직급'으로 매겨지는 점수 앞에 나는 침묵했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덧붙일 말도 없었다.

결국 첫 진급에서 누락했고, 그 패배감은 오히려 명확한 탈출구가 되었다.





사표를 던지고 몰입을 선택하다



또 한 번의 장기 파견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현장근무와 동시에 본격적인 이직 준비에 돌입했다. 퇴근 후에는 숙소에서 NCS와 전공 서적을 폈고, 주말에는 본가로 돌아가 근처 스터디 모임에 나갔다.


낮에는 현장의 소음과 싸우고 밤에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는 나날이었다.


안정적인 울타리를 스스로 걷어차기 위해 필요했던 건 대단한 용기보다 '매일 밤 이 자리를 지키는 간절함'이었다. 퇴근 후의 이 작은 방은 나만의 치열한 전장이었다.


하지만 현장 업무와 이직 준비를 병행하며 '어느 쪽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부채감이 나를 짓눌렀다. 지금은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완전한 몰입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다음 행선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표를 던졌다. 안정적인 대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 광야로 나가는 순간이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명함의 이름표보다 소중한 '나만의 고도'를 찾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신가요?


이전 03화사기업 vs 공기업, 직장선택의 우선순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