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영화 제목 같다..
내 고용주(이하 사장님)는 시급 2만 원을 책정했다. 보통 최저시급의 1.5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야간 시급으로 책정하는데, 내 급료는 더 높다. 그리고 첫날 교육 때나 물량을 얼마 처리하지 못하던 초기 때부터 한 번도 딜레이 없이 급료를 지급힌디. 우리 회사도 챙겨주지 않는 추석 선물 세트를 나에게 안겨줬으며, 역시 초반 내 실수로 인해서 손해를 입었는데도 나에게 격려를 해주었다. 나는 새벽 네시반부터 두 시간 근무하는데, 요즘은 스케줄이 매일 잡혀있는 것이 아니고 간헐적이라서 큰돈은 되지 않을지라도 내 용돈으로 삼기에는 충분하다.
가끔 다른 배송기사의 구역을 지원하는 품앗이를 나가는데, 사장님은 내 근무일수를 채워줄 수 있고 또 도움이 필요한 동료를 도울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나름 열심히 해서 인지 나를 선호하는 다른 사장님들도 있는 것 같다!) 놀랍게도 그들은 나보다 훨씬 어리다. 모두 개인사업자로서 많은 물량을 트럭에 싣고 자신도 배송을 하고 또 알바를 몇 명 고용해서 물품을 전부 배송한다. 센터에서 분류 후에 짐들을 운반을 해와서 각 아파트 동 입구에 쌓아놓으면 나와 같은 알바들이 그 물품들을 아파트 각호수로 배송하는 것이다. 오늘은 열두 살 어린 기사가 1톤 트럭을 타고 아파트 지하를 누볐는데, 우리 사장님 역시 다섯 살 어리다. 나는 스물여덟에 뭘 했더라.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자정부터 많은 이들이 출근하는 그 시간까지 삶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 서른 살 무렵의 청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응원과 박수를 건네고 싶다.
나는 거진 생활비로 전부 쓰이는 내 월급 이외에 새벽 배송 아르바이트를 통해 쌈짓돈을 모아서 당근과 알리에서 전자기기와 화분을 사들이는 취미생활을 즐긴다. 아끼는 친구에게 선물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쓸데없는 것들을' 눈치 보지 않고 주문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오늘 새벽 다섯 시에 깨달은 것들을 나누고 싶어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내 하찮은 기억 안에서 휘발되기 전에.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다 당신도 나도.
바쁜 삶 가운데 생각이 나지 않거나 애써 간과하던 것들. 혹은 알고 있긴 한데 화가 나서 당장 적용할 수 없는 그런 것들.
#1
지하에 꾸려진 택배물품을 각 아파트 호수 문 앞에 배달하는 내 업무는 정해진 배송량을 마치는 대로 퇴근이다. 정해진 근무시간이 두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내 역량에 따라 80분이 될 수도 있고 두 시간을 꽉 채울 수도 있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두 시간이 모자랐다. 80건 남짓인데도 시간에 압박 때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가뜩이나 굼뜬 내 손이 아쉬울 만큼 일의 진척이 느렸다. 대략 석 달 정도 일했더니 이제는 손에 익어서 120건이 넘는 물량을 가지고도 넉넉히 한 시간 사십 분 정도면 일이 끝난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물량이 많은 날에, 참 곤란한 구조를 가진 아파트가 배정됐다. 150건 가까이 되었는데, 두 시간을 겨우 맞추거나 그마저도 자신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짜증. 분명 시급 2만 원으로 하루 일당 4만 원이 책정되어 있는데도, 두 시간을 꼬박 일해야 하는 것이 왠지 탐탁지 않았다. 당연한 스케줄에도 말이다.
내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불편. 한 시간 반이면 끝나는 날도 있는데 두 시간을 꽉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
당연한 것들에 대한 짜증과 이질감. 사람은 편한 것에 최적화되는 것 같다.
#2
왜 아파트 구조를 이렇게 지었을까. '대장'격으로 불리는 우리 동네의 브랜드 아파트는 구조가 이렇지 않다.
외부인이 보기에도 편한 동선에 깔끔한 디자인. 역시 비싼 값을 하는구나 하는 선입견은 덤이다.
동네 아파트는 거의 다 가본 것 같다. 아내가 소소하게 했던 인터넷판매와 더불어 지금 하는 배송업무,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당근 거래 덕분에 다른 아파트 방문이 익숙하다. 영종도 안에 족히 서른 군데 가까이 되는 아파트 단지를 전부 방문해 보았다.
아무튼 오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파트 단지- 내 일터로 향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릴 것, 각 동마다 두 개로 나눠진 아파트의 지하 현관을 서로 착각하지 말고 출입할 것. 날렵한 발걸음으로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일 것.
마음을 단디 먹으니까, 오히려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일이 수월했다. 예전에는 출입구를 착각해서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는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었다. 밤새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절친 K와 카톡을 주고받고, 온라인으로 주문한 상품 문의에 대한 답변을 확인하면서 일할 수 있을 만큼.
마음먹기에 따라 근무 환경이 달라진다. 아니다 환경은 같은데 내가 달라진다.
가끔 삶이 나를 엿먹이는 게 아니고, 나를 가르쳐준다.
아니 한 번도 엿 먹으라고 한 적이 없었다. 나보고 강해지라고, 얼른 배워서 잘 준비하라고 했지. 엿 먹는 건 나 스스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