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자입니다

by 밤호랑이

그리고 나는 지갑에 여유가 있습니다.

7천 원짜리 라테를 주문하고,

서랍에는 3백만 원짜리 손목시계도 있습니다.

친구를 만날 때는 좋은 음식점에서 호기롭게 결제 카드를 꺼내듭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한테는 값비싼 선물도 곧잘 합니다 '가오 상하니까', '그래야 면이 서니까'

내가 운전하는 차량은 항상 최상급이어야 합니다. 좋은 타이어, 엔진오일, 정기적인 세차.

어제는 하루 종일 세무사와 연락하고 인터넷 정보를 찾아보고. 곧 결실을 맺겠지요, 스물아홉 살 때부터 큰 대출을 받아서 줄곧 투자를 해왔습니다 매일 오르락내리락 지표와 정책에 가슴 졸이곤 했지만 이젠 결실을 맺겠지요. 의식주의 해결입니다 곧.


하지만 나는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만난 남루한 차림의 할아버지의 시선을 무뚝뚝하게 외면합니다.

세상에는 공짜는 없으니까, 사기 치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나를 속이려 드는 건 딱 질색이니까.

저녁이 될 때까지 아직 한 끼도 못 먹었다는 당신의 이야기는 내 알바 아닙니다.

나도 이 세상 살아내느라 죽을 만큼 허기집니다. 일도 많았고 컨디션도 안 좋은데, 오늘따라 마음이 텅 비어서 미치겠습니다. 이것저것 억지로 마음속에 집어넣어 보지만 다 튕겨 나옵니다.


배고픈 나를 위해, 당신은 포도주를 건네며 빵을 주섬주섬 꺼냅니다. 아, 미안합니다. 지금 고기를 잔뜩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도무지 흥미가 생기질 않는군요.


나는 가난합니다.

어쩌면 오늘이 생애 마지막날이라는 당신의 절규를 무시합니다. 나한테 간단한 호의를 베풀지 않는 거래처 직원과 상담원에게 신경질을 쏟아냅니다. 바쁜 출근길에 느림보 거북님 초보운전자는 또 무슨 일입니까.


나는 죽을 만큼 가난합니다.

너무 가난해서 눈물이 흐르고 얼굴을 도무지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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