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이상하다
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나이를 비롯 어떤 것도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내용은 그의 허락을 받았으며, 1인칭 시점에서 서술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성공했다고 말한다.
방송에 나오는 내 얼굴을 보면, 어디 잡지에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저 남자 인생 재미있게 산다. 넘어져도 금방 일어서네. 여자도 많고 돈도 많고 결국 잘 나가는구나.
맞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살아야만 버틸 수 있었다.
뭣도 없는 집에서 태어나, 아무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던 곳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기어올랐다.
욕도 먹고 굽신거리기도 했고, 때로는 내가 나를 팔아먹는 기분으로 견뎠다.
당신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만 챙기자 라는 스위치가 자동으로 켜진다.
사리사욕? 그것도 맞다 그게 나를 살렸다. 그래서 유력가 손녀와 결혼 소개가 들어왔을 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 좋지
이만큼 올라왔으니 이제는 더 위로 갈 차례다. 그 여자 역시 자기 이득이 될만한 뭔가가 필요한 건 확실하고.
내겐 내연녀도 있다.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도 나도 어딘가 서로를 ‘대체 가능한 무언가’처럼 취급하니까.
살아남는 게 중요한 삶을 오래 살면, 죄책감은 사치처럼 여겨진다. 아니다 그렇게 항변하고 싶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을왕리 근처에 왔다가 일하고 있는 형을 굳이 불러서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에겐 곤란하고 어려운 감정이다.
모든 게 완성되어 가던 어느 날, 내 머릿속에 갑자기 얼굴 하나가 지나갔다. 이십 대에 나도 잘 나갔을 때 사귀었던 정말 말도 안 되게 착한 아이- 뭐든 나를 믿어주던 사람의 얼굴이다. 도무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오히려 미안해져서 먼저 놔버렸다.
그런데 참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그 이후다. 그 애가 다시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는 거다.
건너 건너 그 아이와 연락이 되고 두 달 전엔가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봤다. 슬슬 연말이고 핑계도 적절했다.
많이 변하지 않았다. 내가 떠나간 뒤의 시간들이 그녀를 세련되게 만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너뜨린 것도 아니었다.
어색한 첫인사 뒤에 그 친구가 한다는 말이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잘 되길 바랐어.”
누구에게서 들을 수 없는 그런 어투였다.
조건도, 계산도, 목적도 없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냥 애매한 감정이 들었다. 그게 끝이었다.
드라마도, 눈물도, 미련도 없었다. 그냥 조용한 만남. 아무도 모를 아무 일 없는 하루.
그런데 문제는 그 조용함이었다.
이게 더 미친다.
내가 화려한 사람들 틈에서 수없이 느꼈던 공허함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잠잠하게 채워준다.
나를 ‘상품’으로 보지 않는 단 한 사람인 것 같다.
담당 웨딩플래너의 안내 책자를 받던 그 날밤에 자꾸만 그녀의 말투가 생각났다. 어떤 향수보다 오래 남는 그런 냄새, 비싼 샴페인보다 더 뚜렷하게 남는 맛 같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린 것 같을 때,
그녀만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인 것 같다.
옛날에 내가 우리는 각자 갈길이 다르고 무엇보다 서로 맞지 않는 카드? 라면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싸가지없게 말한 것 같은데 그 친구가 웃으면서 그랬었다.
“괜찮아. 오빠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헤어질 때도 오랜만에 봤을 때도 똑같은 얘기를 들으니까 마음이 무너진다. 그땐 그 말이 가볍다고 생각했다.
말할 게 없으니 던지는 마지막 인사 정도로.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이상하게 무겁다. 하필 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를 흔든다.
나는 행복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아니면 살아남으려고 여기까지 왔나?
계약.. 아니다 약혼 날짜는 다가오는데, 요즘 밤마다 그녀의 인스타를 뒤진다. 스토킹은 당해봤어도 내가 이러는 꼴은 나도 낯설다.
자잘한 일상, 평범한 표정, 어딘가 촌스러운 셀카- 다 볼품없고 어디 내세울 만한 건 하나도 없다.
근데 이상하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해 보인다.
나는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걸 포기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 같은데 사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모두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눈에 밟히는 이유는 그 여자가 예뻐서도, 과거를 그리워해서도 아니고, 내가 잃어버린 ‘나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제일 큰 문제가 지금 결혼식장이며 날짜며 확정하는 게 아니라,
그녀를 잃는 일이다.
이번에 잃어버리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완벽했던 내 일상 전체가 자꾸만 이상해진다.
그리고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앞에서
처음으로 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