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오기 싫은 기억들
아저씨가 다 된 후에야 정신과에서 지능검사를 받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심리학 전공이라는 얄팍한 타이틀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마치 준비된 답안지를 들고 있다는 듯 임상심리사의 질문과 과제에 척척 대답해 나갔다. 특히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모든 문항은 차분하고 아주 재빠르게. (추후 진료 기록지를 발급받을 일이 있었는데, 내 대답을 못 따라갈 만큼 내 템포가 빨랐다고 한다) 문제는, 수학과 도형, 기억력에 대한 과제가 나오자 이내 포기했다. 거의 그 파트 통째로 그만하고 싶다고 얘기하자 그 사람은 차근차근히 생각해도 된다고 한번 더 권하기까지 했다.
그 상황이 불쾌했다. 도형과 숫자들이 지문에 등장하고 그것들이 나를 시험하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더 이상 진행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중학생 때로 돌아간다. 수학시간에 늘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던 아이. 기본적인 개념에서 조금만 벗어난 문제를 만나면 당황해서 급해진 마음과 나만 뒤처진다는 생각에 우울하고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들어 숨 막히던 그때가 기억난다. 노력이 수반되어야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을 텐데 현실을 잊기에는 컴퓨터 게임이 제격이었고 괴리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학습된 무기력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또는 학습된 무력감은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경험으로 학습하여 이후에 실제로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거나 극복할 수 있으면서도 그런 상황에서 회피하거나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는 현상을 뜻한다. 마틴 셀리그만과 동료 연구자들이 동물을 대상으로 회피 학습을 통해 공포의 조건 형성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현상이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해도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이 학습된 것이다. 셀리그먼은 이를 보고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결과지에서는 나의 언어 지능이 상위권에 속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우울과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나의 재능이 발현되는 것을 제한했다고 한다 스스로.
인천공항 활주로 진입 전 항공기가 주기되어 있는 '주기장'에서의 나의 보직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항공기가 정시에 출항할 수 있도록 감독하는 역할이다. 혹자는 매니저, 혹자는 편의점 파트타이머 같다고 얘기하는데 거기에 사족을 달고 싶지는 않다.
캡틴이 더 빨리 출항할 수 있냐고 물어보길래, 10분 정도는 일찍 출발 가능하다고 얘기해 줬더니 썩 만족하며 'very optimistic'이라는 표현을 했다.
전도 유망한 청년기에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불혹이 된 지금에서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