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포인트 1>
집 앞길 건너편 골목에서 굴다리를 지나면 바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는 집이 나왔다. 굴다리 옆집의 대문 끝에 달린 긴 끈을 쭉 잡아빼면 열쇠가 나왔다. 그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 집인 것처럼 노크도 하지 않고 미닫이문을 열면 어린아이의 가벼운 무게에도 오래된 마룻바닥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뭉툭해진 크레파스를 들고 TV가 있는 안방에 배를 깔고서는 되고 싶은 나를 그렸다. 유치원생 시절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크레파스로 할아버지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옷을 여러 가지 그려 보여주면서 ‘나중에 커서 꼭 옷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초등학생 때는 책을 보다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꿈을 바꿨다. 몽상과 글쓰기를 재밌어하던 어느 날은 동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꿈은 계속 명사로 머무르지 않고 그림이 되었다. 어느 때는 되고싶은 어른의 모습을 상상하면 둥근 원탁에 사람들이 둘러앉은 모습이 떠올랐다. 벽면에 혼자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학생 때는 공부를 잘하는 세계에서는 못하는 편, 공부를 못하는 세계에서는 잘하는 편,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했다. 나에게 선택권이 인문계 고등학교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제대로 공부를 시작했다. 하기 싫을 때보다 할 수 없을 때 반항감이 커진다. 어릴 때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실력에 화가 나서 빼먹기도 했던 가야금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공부에 더 흥미를 잃었다. 수업 시간에도 수업은 안 듣고 책만 읽었다가 담임 선생님이 엄마에게 이르곤 했다.
사회에서 좋다고 평가받는 대학교에 가야 성공한 인생이었던 시절에는 서울이거나 서울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대학교를 진학해야 했다. 그때는 공부를 잘하는 게 창피하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시골에서는 비교 대상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릴 때 여러가지로 변해왔던 꿈이 엄마 아빠가 바라던 장래희망과 비슷해졌다. 꿈이 뻔해졌다기 보다는 학교에 제출하는 장래 희망 종이에 써서 내는 내용만 비슷해졌다.
안정적인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던 엄마와 아빠는 내가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구본을 보면서 자라고 세계지리를 좋아했기에 지리 교육학과를 가고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좋아하는 게 한가지가 아니었고, 확실하지 않았다. 하나를 선택했을 때 선택하지 못한 하나는 잃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멀리 가고 싶었다. 더 정확히는 누구의 영향도 받지 못하는, 장흥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 동네에 초등학교 하나, 중학교도 하나, 고등학교까지 하나. 그리고 이 고등학교에서 가장 많이 가는 대학교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갑갑했다.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나가고 싶었다.
무엇을 배우는지 잘은 몰랐지만, 외국을 많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과를 적어 원서를 썼고, 합격했다. ‘경기/기타’ 옆에 써 있는 숫자 ‘3’, 나와 함께 졸업한 동창은 200명이 조금 안되었는데 우리 학교에서 이 학과를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를 포함해 딱 세 명이 이 학교에 입학했다.
인천에 있는 학교였다.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시골 소녀는 외국에 많이 갈 것 같은 ‘국제통상’ 전공을 선택했다. 스무살이 되기까지 내가 입는 옷도 선택할 기회가 몇 번 없었을 만큼 주어진 대로 살아왔는데 처음으로 인생을 바꾸는 선택을 스스로 했다. 그때 이후로 앞에 다가온 모든 선택은 혼자 했다. 늘 꼭 맞는 성공적인 선택을 한 적은 없다. 후회하면, 후회하고 나서 알게 된 것들이 그 다음의 나에게 반드시 영향을 미쳤다.